X염색체, 후성유전학, 사교육 시장, 그리고 ‘공부력’의 진짜 재료
시험 성적이 오르면 많은 부모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우리 아이,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걸까.”
어느 날은 아빠 쪽 머리를 닮았다 하고, 또 어떤 날은 엄마의 지적 습관을 닮았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대화 속에는 “아이의 능력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믿음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야말로 한국 교육을 흔드는 보이지 않는 전제입니다.
사실 유전은 씨앗에 불과합니다.
아이의 공부력은 씨앗 그 자체보다, 계절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왜 우리는 ‘유전 신화’에 매혹되는가
사람은 복잡한 결과를 단순한 원인으로 설명해 주는 이야기에 쉽게 끌립니다.
“타고났다”는 말은 부모에게 위로가 되고 책임을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통제감(Internal Locus of Control)이 낮아질수록 사람은 운명론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Rotter, 1966).
입시는 불확실하고 점수는 흔들리기 마련이니, 부모는 뇌 속 유전자를 탓하는 순간 잠시나마 안도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위험합니다.
불안을 줄여주는 대신, 아이의 오늘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 실천을 놓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유전 신화는 부모의 마음을 달래줄 뿐, 아이의 성장 궤적을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과학이 말하는 것: ‘한 유전자, 한 운명’은 없다
지능은 단일 지표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IQ 점수조차도 수면의 질, 정서 상태, 영양 섭취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따라서 지능은 다유전자적 특성이며, 동시에 후성유전학적 조절을 받으며,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Plomin & Deary, 2015).
여성은 X염색체를 두 개, 남성은 X와 Y를 각각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들은 어머니로부터 X염색체를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지능과 관련된 유전자가 X염색체에 일부 분포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들이 어머니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크게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 대중서에서 언급된 “아들의 지능은 100% 엄마에게서 온다”는 주장은 사실 가나자와 사토시라는 학자가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주장은 학계에서 검증된 논문이 아니며, 미국 심리학회조차 공식적으로 반박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한 과장된 서사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더 나아가, 후성유전학적 관점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드러납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오랜 시간 성장하며 영양, 호르몬, 스트레스, 심리적 안정 등 수많은 환경적 요인을 경험합니다.
이 과정에서 엄마의 영향력이 아빠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즉, 유전적 차원에서 X염색체의 기여가 있다면, 발달적 차원에서는 자궁 환경이라는 독특한 맥락이 아이의 두뇌 형성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기는 셈입니다.
의학적 연구는 이를 뒷받침합니다.
예를 들어, 임신 중 산모의 영양 상태와 스트레스 수준은 태아의 전전두엽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된 바 있습니다(Barker, 2007; O’Donnell & Meaney, 2017).
이른바 ‘태아 프로그래밍(fetal programming)’ 이론은, 뱃속에서의 경험이 훗날 아동의 인지 능력과 정서 조절에 장기적인 흔적을 남긴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지능이라는 복잡한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지능은 유전자와 환경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움직이는 퍼즐이며, 부모의 역할은 누가 더 많이 물려주었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가능성이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있습니다.
한국 교육 현실: 유전 담론과 사회 구조의 교차
대한민국 사교육 시장은 늘 ‘확실성’을 팔아야 살아남습니다.
그래서 간판, 데이터, 유전 같은 단어가 매력적으로 포장됩니다.
“선천적 재능을 깨우는 ○○훈련”, “유전형 맞춤 두뇌 코칭”이라는 문구는 복잡한 발달 과정을 단숨에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문제는 이 담론이 부모를 유전 운명론에 고착시키는 데 있습니다.
‘타고난 머리’라는 서사는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의대 정원은 한때 확대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이 현상은 단순한 진학 선호가 아니라, 안정성과 계급 이동의 희소 자원을 ‘의사’라는 직업에 집중시키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안을 보여 줍니다.
고교학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도적으로는 학생 선택권을 넓힌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학교 간 과목 개설 격차와 교사 인력 부족 문제로 인해 도시와 농어촌, 일반고와 특목고 간의 간극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명문대 진학률 역시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입니다.
특정 지역의 학생들은 촘촘한 사교육과 인적 네트워크 덕분에 훨씬 높은 진학률을 기록하는 반면, 다른 지역 학생들은 출발선부터 불리합니다.
결국 유전 신화는 이런 불평등을 가리는 장막에 불과합니다.
실제로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아이의 성취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로 작용합니다.
공부력은 ‘환경 루틴’에서 자랍니다
유전은 초기 조건을 형성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취는 반복되는 환경적 맥락에서 탄생합니다.
부모가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일곱 가지를 제안합니다.
수면 위생 (Sleep Hygiene)
같은 시각에 잠들고 깨게 합니다. 성장기 전전두엽은 ‘같은 시간’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감정 루틴 (Emotional Routine)
시작·중간·종료 신호를 일정하게 줍니다. 작은 성취 뒤 즉시 강화는 실행 기능을 조율합니다.
독서와 대화 (Reading & Dialogue)
요약보다 ‘왜 그랬을까’ 질문을 더 많이 던집니다. 추론 어휘가 사고의 뼈대를 만듭니다.
과제 쪼개기 (Task Chunking)
한 번에 20분, 목표는 행동 단위로 설정합니다.
피드백의 질 (Quality of Feedback)
정답 칭찬보다 전략 칭찬을 강조합니다.
모델링과 협력 (Modeling & Collaboration)
조용한 환경보다 조용한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공부도 사회적 행동입니다.
디지털 위생 (Digital Hygiene)
알림 차단, 앱 잠금, 타이머 활용으로 장치를 관리합니다.
이 일곱 가지는 유전자를 바꾸지는 못하지만, 발현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후성유전학의 교육적 번역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심리학적 개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첫째, 자기 결정성(Self-Determination Theory, Deci & Ryan, 1985)입니다.
불안을 기반으로 한 훈육보다 아이가 ‘내가 선택했다’고 느낄 때 학습 지속성이 압도적으로 높아집니다.
둘째,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Seligman, 1972)입니다.
“머리가 나빠서 안 된다”는 말은 아이에게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신호를 주어 성취동기를 꺾어 버립니다.
철학적 성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나아가는 존재’라고 설명했습니다.
씨앗이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흙과 빛, 물과 계절이 필요합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전은 가능태에 불과하고, 현실태로 나아가는 과정은 환경과 습관, 그리고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동양 철학에서도 같은 맥락이 발견됩니다.
장자는 “성품은 같으나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性相近 習相遠)”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성취를 결정하는 것은 타고난 성품보다 반복되는 습관입니다.
현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을 ‘탄생성(natality)’의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인간은 언제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이는 유전이 아니라 환경과 선택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를 닮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삶의 조건을 제공받았는가’입니다.
부모는 유전의 심판자가 아니라 환경의 설계자입니다.
오늘의 집이 내일의 전두엽을 빚습니다.
아이의 뇌는 점수보다 일상의 리듬에 더 민감합니다.
결국 교육의 본질은 유전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시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씨앗을 탓할 것이 아니라 계절을 설계해야 합니다.
유전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공부력은 계절의 리듬 속에서 자랍니다.
그리고 그 계절을 바꾸는 힘은 부모의 불안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설계한 일상의 루틴입니다.
매주 쓰는 이 작은 글들이, 아이와 부모를 넘어 사회 전체의 대화를 여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103동 언니, 의대 교수 김성곤의 부모가 먼저 자라는 수업
Parenting Insights by Prof. Seong-Gon Kim
참고문헌
Gardner, H. (1983). Frames of Mind: The Theory of Multiple Intelligences. Basic Books.
Plomin, R., & Deary, I. J. (2015). Genetics and intelligence differences: five special findings. Molecular Psychiatry, 20(1), 98–108.
Meaney, M. J. (2010). Epigenetics and the biological definition of gene × environment interactions. Child Development, 81(1), 41–79.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APA). (2012). Statement on claims of genetic determinism in intellig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