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로 자란 세대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해석
‘유별나다’는 말이 만든 마음의 그림자
며칠 전, 제자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스무 살 청년이었습니다.
말은 또렷했지만 눈빛엔 오래된 피로가 앉아 있었습니다.
“교수님, 저는 어릴 때부터 유별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고집이 세고, 남들과 다르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늘 튀어 보인다고 했어요.
그래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결국엔 저 자신을 미워하게 됐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웃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연기를 하며 살아갑니다.
편한 척, 둥근 척, 착한 척. 그러면 좀 덜 아프거든요.”
그 말을 들으며 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연기하며 산다’는 고백 속엔,
자신을 지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세월이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다름을 품고 태어납니다.
그 다름은 처음엔 빛나지만, 비교가 시작되면 금세 결함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결함을 오래 들여다본 아이는 결국,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며칠 뒤, 그는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조금 더 단단해진 얼굴로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유별나고, 고립되고, 남들과 다른 나 —
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까요?”
그 한 문장이 제 마음을 멈춰 세웠습니다.
그가 묻고 싶었던 건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가 아니라,
“이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며 살아야 할까?”였습니다.
해석이란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픔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아픔을 자기 언어로 다시 써보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의 ‘다른 나’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 다름이 때로는 개성으로, 때로는 결핍으로 번집니다.
그러니 다름은 병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스무 살은 자아 확신과 자기혐오가 가장 세게 부딪히는 시기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다음 날엔 아무에게도 필요 없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진동 속에서, 진짜 자아가 조금씩 모양을 드러냅니다.
부모의 말이 아이의 해석을 바꾼다
그럴 때 부모의 말 한마디가
그 불안한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너는 왜 그렇게 유별하니?”
“그건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이 말은 훈계가 아니라 ‘낙인’으로 작용합니다.
아이의 뇌 속에 “나는 잘못된 존재야”라는 문장이 각인됩니다.
그리고 아이는 세상과 부딪히는 대신,
‘연기하는 나’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유별함은 결함이 아니라 문법이야.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세상이 넓어져.
그러니 그 다름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조금씩 네 언어로 해석해 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을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 짧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기 안의 문장을 다시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도
결국 이 ‘해석의 언어’를 함께 찾아주는 일입니다.
아이가 자신을 미워할 때,
“그럴 수도 있지. 그때는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잖아.”
이 한 문장으로 아이의 내면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아이를 변명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대신 ‘나는 틀린 존재가 아니다’라는
가장 근원적인 믿음을 회복시킵니다.
진짜 성장의 시작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됩니다.
공부와 비교, 평가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자랍니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어디에도 어울릴 수 없다”라고 말하는 청년이 됩니다.
그 말의 뿌리엔,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의 말에 어울리지 못했어요.”
라는 문장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이를 가르치려 하지만,
사실 아이는 어른의 말에서 살아갈 언어를 배웁니다.
그 언어가 비난이면 아이는 자기혐오를 배우고,
그 언어가 이해라면 아이는 자기 수용을 배웁니다.
결국 부모의 말은 아이의 해석을 바꿉니다.
“왜 그랬어?”라는 질문 대신,
“그럴 수도 있지, 네 마음은 어땠어?”라고 물을 때
아이의 뇌는 ‘나는 괜찮은 존재야’라는 문장을 새로 배웁니다.
아이가 자신을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첫 무대를 만나게 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아이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이제는 나를 이해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그것이 자기혐오의 반대편,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시 품어 안는 성장의 시작입니다.
아이의 성장은 결국 부모의 해석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아이를 이해하는 방식이,
그 아이가 자신을 대하는 방식을 결정하니까요.
103동 언니, 김성곤 교수의 부모가 먼저 자라는 수업
Parenting Insights by Prof. Seong-Gon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