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에 태어난 단관극장의 쓸모에 대해
나의 꼬마 친구에게 어떤 경험도 안겨주지 못할 것 같았던 아카데미극장이 14년 만에 열렸을 때, 친구는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과 극장을 찾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이 저마다 뭘 느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그들이 1990년대에도 다 같이 극장에 앉아 있었다는 것, 2020년대에도 다 같이 앉을 수 있다는 것,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와 함께.
원주에서 자란 내겐 담력이 필요한 출렁다리 외에, 과거에 원주에 있었고 현재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곳이 필요하다. 가톨릭센터에선 더 이상 인형극을 상연하지 않고(만듦새가 조악한 인형도 주지 않고), 중앙시장 1층에선 더 이상 어린아이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던 액세서리들을 팔지 않는다. 디즈니 상품을 원주에서 처음으로 정식 수입해서 팔던 도영쇼핑을 지금의 어린이에게 얘기할 때면, 마치 다른 나라의 일 같다. 아이에게 내가 아이였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줄 장소가 남아 있다는 건 소도시, 지방으로 분류되는 곳에 사는 사람의 자부심, 애정과도 연결된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에 정을 주기란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애정을 갖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작년에 아카데미극장을 사들인 원주시가 ‘보존 가치’를 들먹이며 극장 복원을 주저하더니, 끝내 문체부의 사업으로 받은 국비를 올해 예산에 편성하지 않았다. 필요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큰 동상을 짓고(원주 여기저기의 이야기), 필요에 의해 주차장을 만드느라 앞집 어린이의 유일한 놀이터를 부수고(원주 우산동의 이야기), 필요에 의해 영화제를 없애고(평창, 강릉의 이야기) 필요에 의해 작은도서관을 독서실로 만든다고 하는(서울 마포구의 이야기) 와중에 1963년에 태어난 영화관은 얼마나 무용해 보일까. 그걸 지키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반면 영화관이 서 있는 자리는 어쩐지 누군가에겐 쓰임이 많아 보이는 듯하다.
장소와 함께 나이를 먹는 것, 시간이 쌓인 곳을 가까이에 두고 만나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맞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런 날들이 이어지면 시간과 경험이 포개진 장소를 고이 보내지 않을 테니까. 오래된 놀이터, 마을, 극장 등을 허무는 걸 자연스럽게 보지 않을 테니까.
내가 아카데미극장에 원하는 건 단순하다. 그저 ‘도대체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본 곳이 문화극장이야, 아카데미극장이야?(나는 문화극장으로, 누군가는 아카데미극장으로 기억한다)’를 극장에 앉아 생각하는 일. 물론 영화를 보면서. 이 값진 시간의 연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의 원주를 생각할 것이다. (3년 전처럼) 더 이상 오랜만에 열리는 극장을 청소하고 싶지 않다. 극장 내 오래된 물건을 찾는 보물찾기를 하고 싶지 않다. 이미 보물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언젠가 ‘또’ 주차장이 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채로.
대학 때 배운 이야기의 3막 구조 중 1막에서는 방해자가 등장하고, 극적 긴장이 고개를 든다. 2막에선 긴장이 고조되며 적과의 대립이 팽팽해진다. 문제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다. 동시에 주인공은 조력자의 도움을 받는다. 3막은 해결과 정리의 파트다. 문제가 매듭지어진다. 주인공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카데미극장은 바로 이 막에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