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요즘원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자 Jul 20. 2024

사라진 마을의 황진영

혁신도시가 되기 전 반곡동을 떠나온 황진영 인터뷰

원주 혁신도시가 생기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

황진영의 자취를(나와바리를) 찾아서


진영과의 카톡


진영

저희 집이 어디쯤이었냐면 반곡역에서 쭉 내려오면 동네가 하나 있었는데, 동네 이름이 뱅이둑이었어요. 반곡동이 되게 오래된 동네다 보니까, 옛날 동네 이름들을 그대로 썼어요. 뱅이둑, 뒷골, 봉대초등학교 있는 데가 봉두. 그리고... 생각이 안 나. 너무 오래됐어. 좀 두서없이 얘기할게요.

버스가 어느 쪽으로 들어왔냐면 시내에서 들어와서 치악교를 건너서, 지금 별밭어린이집. 아파트가 있고, 바로 앞에 별밭어린이집이라고 있어요. 거기가 1차로예요. 2차선이 아니라 1차선 도로로 들어와서 반곡동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있었거든요. 거길 지나서 교통방송국. 그때는 교통방송국이 아니라 유선방송국이었거든요. 유선방송국을 지나 쭉, 밑에서 꺾으면 포도밭이 있었고, 그 포도밭 지나서 가다 보면 삼보골, 반곡역, 뱅이둑, 봉두… 그런 식이었어요. 버스가 삼보골에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서 저희 동네 쪽으로 갔다가 봉대초등학교 앞에서 다시 돌아서 시내로 나갔어요.


진영
동네에 속속들이 사람들이 다 사니까, 버스가 여기저기에 서야 하잖아요.
그 동네는 기억이 잘 나서 지도도 그릴 수 있어요.

진영이 그린 혁신도시가 생기기 전 반곡동 지도

진영

여기 행구동 큰길 있잖아요. 여기 영광교회가 있고, 여기 현대아파트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여기 사잇길이 있어요. 여기 쭉 들어오면 이쪽이 오리골이라고 여기, 여기가 이제 행구동 길 앞에 있는 동네고, 이렇게... 오리골이랑 되게 오래된 공로가 있고, 여기 KT 연수원이 지금도 있어요. 오리골에서 이렇게 한참 들어오다 보면 삼익아파트는 이쯤 어딘가에 있고, 여기 별밭어린이집이 있고, 여기가 치악교예요.
치악교에서 별밭어린이집으로 쭉 오면 한 이쯤이 유선방송국. 이렇게 가면 이쯤에 공터 같은 데가 있고, 여기 희정이네 집이 있고... 지도가 잘 안 그려지네. 여기. 아무튼 이쪽으로 가면 삼보골. 삼보골이 지금 스타벅스 있는 그쯤이에요. 저희 집이 요 근방인데, 지금의 관광공사 있는 쪽이요.
반곡역에서 내려가면 이쪽이 저희 동네였고 이쪽이 봉대였어. 봉대초등학교에 있는 데, 여기 삼보골. 아무튼 이렇게 쭉 올라와서, 버스가 여기서 삼보골 갔다가 한 바퀴 돌면 여기 양계장이 되게 큰 데가 있었거든요? 닭똥 냄새를 맡으면서 다시 돌아와. 돌아 나와서 이쪽으로 다시 왔다가 봉대에서 다시 돌아서, 다시 시내로 나가는. 그런 식이었어요.


산으로 둘러싸인 옛 봉대초등학교. 사진 출처: 다음 카페 '봉대 14회 친구들'
아파트로 둘러싸인 지금의 봉대초등학교
진영 말대로 '지금도 있는' KT 연수원
오리골 쉼터
쉼터를 만들어주는 1000년 넘은 느티나무

진영

반곡동 들어가는 버스가 하루에 여덟 대 있었어요. 그 동네 사는 애들이 다 봉대초등학교 나왔을 거 아니에요. 그럼 봉대초등학교 애들은 다 상지여중에 가요.
여자 애들은 상지여중, 남자 애들은 원중. 그래서 버스를 타면 다 상지여중 아니면 원중 애들밖에 없어요. 고등학생 되면 원주 시내로 유학을 가거나 아니면 여기서 계속 다니는 건데, 새벽 6시 45분 차가 첫차였거든요. 고등학생들은 다 그 차 타고 다녔어요.

이쯤에 되게 큰 포도밭이 있었고, 여기가 다 산이었어요.

이렇게 산. 여기도 산. 산이 막 이렇게 막 꼬불꼬불, 꼬불꼬불. 지금은 이 산들이 없어요. 산을 다 깠어요. 그리고 이쯤에 되게 오래된 저수지가 있었는데 귀신이 나오는 저수지였거든요.


미자
진짜요?


진영
맨날 언덕을 이렇게 올라간 다음에 우리 동네로 내려와야 했단 말이에요.
근데 여기 귀신 나온다고 낮에도 애들 못 가게 했어요. 거기 꼭 한번씩 사고 난다고. 궁금했던 게 그럼 이 귀신은 콘크리트 밑에 깔렸을 것인가... 이 귀신은 대체 어디로 갔을 것인가...


반곡역(폐역)

진영

제가 원주에 95년에 왔거든요. 삼일절에 이사 왔어요. 반곡동에 들어간 건 96년 가을쯤인 것 같아요.

미자
반곡동에서 얼마나 사신 거예요?

진영
10년 좀 넘게 살았어요. 2008년에 신림으로 이사 왔으니까, 그 전까지.

미자
그럼 반곡동이 재개발된다는 건 언제쯤 들으셨어요?


진영
2006년에요. 재개발하면 설명회 같은 거 하잖아요. 그러면 다들 알게 되는 거죠. 주민 설명회를 하니까. 엄마 아빠가 그 얘기를 하셨던 건 기억나요. ‘공시 지가로 땅 가격을 매겨서 준다.’ 근데 주민들 입장에서는 공시 지가로 보상한다는 게 납득이 안 되는 거죠. 완전 그냥 최저가로 보상한다는 거잖아요. 그걸로 말이 많았는데, 그래서 협상을 했던 게 입주 우선권 있잖아요. 아파트나 상가 입주 우선권 같은 거. 그걸 집집마다 하나씩, 지주들은 다 받은 걸로 알고 있어요. 저희도 받았는데 저흰 입주 안 하고 팔고 나온 거죠.


미자
부모님이 주민 설명회를 다녀오셨으면 으레 가족회의 같은 걸 할 거 아니에요. 당시 기억나는 장면이라든가, 말들이 있나요? 분위기라든가요.


진영
대책을 세우자! 이런 분위기였죠. 언제까지 이사를 가야 된다더라,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런 거. 부모님이 주민 설명회 갔다 오고 나서 어디로 이사 갈까를 많이 찾아보신 것 같아요. 우리 집이 너무 아깝지만 나가라는데 어쩔 수 있나, 나가야지. 대신 될 수 있으면 보상을 많이 받고 나가야 되니까 나무를 심자, 나무가 보상이 되니까. 그래서 아빠가 나무를 많이 심었던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신림으로 이사 오고 나서도 한동안 왔다 갔다 하셨어요. 그러면서 사람들 하나둘 떠나는 것도 보고, 동네가 폐허가 되는 것도 보셨는데, 쓸쓸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미자

2006년에 설명회가 있었고, 이사 갈 때까지 기간은 얼마나 준 거예요?

진영
제가 기억하기론 2년 정도. 언젠가는 집 바로 뒤에 있는 산을 다 깎고 전원주택 단지를 만드는 거예요. 보라색 집, 분홍색 집 같은 알록달록한 조립식 주택을 되게 많이 세웠어요. 단지 이름도 기억해. ‘해맑은 마을’. 근데 집들이 다 지어졌는데 사람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일 년이 넘어도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미리 혁신도시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게 아닌가... 토지 보상을 받을 때 기준이 논밭, 그다음이 택지래요. 그리고 집이 있으면 보상을 더 받잖아요. 우리 가족이 혁신도시가 생기는 걸 떠나기 2년 전에 알았다면, 그 택지는 이사 가기 3년 전에 생겼거든요. 그러니까 부동산 업자들은 완전히 다 알고 있었던 얘기인가 보죠.


진영이 반곡동을 떠나기 2년 전 올라온 '해맑은 마을' 전세 거래 글. 출처: 다음 카페 '부동산 연구소'
철거 중인 '해맑은 마을'.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원주혁신도시 10년의 기록》, 2017

주택 단지 만들고 나서 입주가 안 됐다고 그랬잖아요. 딱 한 집만 사람이 살았는데, 그 한 집이 해맑은 마을 땅 주인인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사는 사람은 없어도 진입로랑 주차장은 다 돼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저희 엄마가 거기서 운전면허 연습을 했어요. 차도 없으니까, 편하게.

공사할 때는 왜 저렇게까지 해서 산을 깎지? 이 동네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와서 살까? 늘 보던 산이 없어지는 거, 되게 충격적이거든요.
또 아직도 기억나는 게, 저희 집 바로 뒤에 축대가 쌓여 있었거든요.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축대 위에서 공사하는 사람들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진영이 살았던 동네.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원주혁신도시 10년의 기록》, 2017
사진으로 작게 남아 있는 진영의 옛집.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원주혁신도시 10년의 기록》, 2017

진영

보통 개발이 된다고 하면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가잖아요. 근데 이 마을은 거의 한꺼번에 떠났어요, 사람들이. 만약 집들이 다 비고, 저희 집만 남아 있었으면 속상했을 텐데, 저희 집도 일찍 나온 편이고. 저희가 원래는 거기서 오래 살 생각으로 간 거란 말이에요. 아빠가 손수 집도 다 수리를 하시고, 그러다 보니 애착도 있었죠. 골목골목 오래된 집들이 많았단 말이에요. 근데 반곡동은 그냥 아예 싹 다, 산이고 저수지고 집이고 밭이고 논이고 싹 사라진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기분이 되게 이상하고...


진영
지금도 이상해요. 혁신도시 가면 너무 흔적도 없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게 개발이 됐잖아요. 근데 길 이름은 남아 있단 말이에요. 뱅이둑길 가면 여기가 뱅이둑이구나, 이쯤이 뱅이둑이구나 하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잖아요. 내가 알던 산도 없고, 언덕길도 없고. 어떻게 그렇게 기존에 있는 것들을, 자연물을 싹 다 없애버릴 수가 있을까. 인간들이, 인간들만 이렇게 이곳을 차지해도 되는 걸까.


뱅이둑사거리 표지판
봉대길 표지판

그리고 공사를 진짜 오래 했잖아요. 신림에서 기차 타고 서울 갈 때 반곡동 공사하고 있는 곳을 지나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실시간으로 다 보이는 거예요. 공사가 어디까지 진척됐는지.
처음에는 집들 철거하는 거 보다가, 그다음에는 다 걷어서 빨간 흙 보이고, 그다음엔 건물들 올라가고, 산 허물고 있고... 이런 거 실시간으로 보다 보니까, 혁신도시를 만든다는 게 뭘 위한 걸까, 이런 생각도 들고... 저수지 귀신은 어디로 갔을까...

진영

저희 집 들어오는 어귀에, 골목으로 쏙 들어가야지만 갈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어요.
그 집에 박** 할아버지라고 계셨는데, 저 다니던 교회 장로님이셨거든요. 항상 허리를 굽히고 다니시던 분인데, 그분 아주머니가 되게 억척스러운 분이었단 말이에요. 맨날 농사지은 거 바리바리 싸서 장에 나가 팔고 그러셨어요. 그 아주머니를 ‘00 엄마’라고 불렀는데 심통 맞다고 해서 사람들이 싫어했어요. 아주머니가 진짜 구두쇠라서 버스도 안 타고 다니시고, 그 많은 짐을 지고 걸어서 40분 되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시는데, 돌아올 때 힘드니까 장로님이 굽은 허리를 해서 맨날 모시러 가고 그랬단 말이에요.

한번은 봉두에서 뱅이둑 쪽으로 걸어오는데 00 엄마가 앞에 가고 계신 거예요. 하도 소문이 안 좋아서 그냥 00 엄마인가 보다, 하고 뒤에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00 엄마가 “으악!!”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시냐고 하니까 “뱀!” 하시길래 봤더니, 그냥 뱀도 아니고 살모사가 이러고(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00 엄마랑 막 도망쳤어요. 같이 뛰어오다가 나중에 둘 다 웃음이 빵 터진 거예요. 언덕 넘어오면서 말 한 번도 안 섞었던 아주머니와 말도 트고...

'OO 엄마'가 생각나는 할머니의 뒷모습
뱀은 요즘도 자주 출몰하는 모양

또 저희 집이랑 제일 친했던 집이 통장 아저씨 댁이었는데, 지금도 부부 두 분이 다 건강하게 잘 계시거든요. 그 댁 할아버지 성함이 황00 할아버지인데요. 진짜 동네에서 제일가는 선소리꾼. 동네에 상여 나갈 일이 있으면 그 아저씨가 무조건 나가서 소리 하시고. 엄마가 요즘도 가끔 얘기해 주시는데, 상이 나서 슬픈 게 아니라 그 황00 아저씨 소리가 구슬퍼서 엄청 울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행구동이랑 마찬가지로 반곡동도 부락이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마을 문화가 되게 잘 돼 있던 데예요. 지신밟기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풍물패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 하는 문화가 있어서 동네마다 소리 잘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미자
이사 갈 때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요?


진영
너무 아깝죠. 왜냐하면 진짜 오래된 한옥이었거든요. 기와가 진짜 옛날 기와. 시멘트 기와가 아니라 돌기와였어요. 들어가면 대청마루가 있고, 방문마다 문풍지 바른 집이었어요. 거길 엄마 아빠가 손보셔서, 정원에 나무 심는 곳도 만들고, 바닥에 돌도 깔고, 엄청 공을 많이 들이셨단 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그 동네가 좋았던 게, 아늑한 느낌이 있었어요. 반곡역이 지금도 높은 데 있잖아요. 아늑한 구릉지 같은 데 마을이 있다, 이런 느낌? 되게 운치가 있었거든요, 멀리서 봤을 때는. 가까이서 보면 다 옛날 집밖에 없지만.
저희 집도 물론 아까웠지만 동네 자체가 그렇게 없어진다는 게 아까웠죠. 그리고 다들 오래 산 사람들이니까 동네 대소사, 집마다 숟가락 몇 개인지 다 아는 거예요.  
한번은 엄마가 어디서 옷 보따리를 갖고 오셨어요. 그래서 “뭐야, 뭐야?” 하고 보니까 양모로 된 회색 카디건이 있는 거예요. 열심히 입고 다녔거든요. 근데 알고 보니까 동네 부잣집에서 버리려고 내다 놓은 옷을 주워 오신 거예요. 그거 알고 엄마한테 막 뭐라고 그랬잖아.

진영의 옛집
진영의 옛집


진영

그때 재밌었던 거는 버스 정류장 표시가 없었어요.


미자
그럼 버스를 어떻게 타요?


진영
다 암묵적으로 아는 거죠. ‘여기는 버스 정류장이다.’
마을 진입로 나가면 버스 다니는 길이 있고, 그 뒤가 언덕배기에 있는 밭이었거든요. 언덕으로 올라가는 좁은 시멘트 길 앞이 정류장인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상지여중 다니는 애들은 다 만나는 거죠.

미자
불편하진 않았어요?


진영
겁나 불편하죠. 그래서 많이 걸어 다녔어요. 남부시장에서 저희 집까지 걸어서 40~50분 걸렸거든요. 그런 기억도 나. 버스가 2시간 반 간격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너무 짜증 나니까 2시간 반이면 차라리 집에 걸어가자, 집에 진짜 많이 걸어왔어요.


미자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진영
시내로 가고 싶었죠. 시내에서 다니고 싶었어요.
근데 반곡동이 생각보다 시내랑 가까워요. 버스가 많이 없어서 그렇지, 막 시내랑 동떨어졌다는 느낌이 사실 안 들었어요. 그래서 시내를 나가도 ‘와, 시내다!’ 이런 건 없었고, 재밌었던 건 막차가 8시 반에 끊겨요. 근데 야자를 보통 10시까지 하잖아요. 행구동에 사는 애들은 마을 방범대에서 차량을 운행해서 애들을 실어다 태워주는데, 반곡동은 그게 없었어요. 그래서 저만 야자를 8시까지 했거든요. 애들이 되게 싫어했어요. 쟤 집에 간다고. 조용히 나가야 되는데 막 “나 간다!” 이러고 나가고.


미자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기도 어려웠겠어요.


진영
완전 연례행사였어요. “우리 집 가자!” 그러면 애들이 시골 간다고 생각하고 오니까. 그리고 버스가 일찍 끊기니까, 한번은 친구들이랑 저희 집까지 걸어왔거든요.
저는 맨날 걸어 다니는 길이니까 아무렇지 않았는데, 애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거예요. 다 왔어? 어디까지 왔어? 네가 살이 안 찌는 이유를 알겠다 그러고... 친구들한테는 진짜 마음먹고 와야 하는 곳이었어요.


미자

원인동 재개발 구역 돌면서 놀랐던 게, 사람들이 집을 떠나는데 안 가져가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진영 님은 이사 갈 때 뭐부터 챙기셨어요?


진영
저희는 남겨두는 거 없이 싹 다 챙겨 왔어요.


미자
사진을 두고 가는 게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진영
그런 거 아닐까요? 사진을 기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물건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두고 갈 수 없는데, 그냥 잡동사니라고 생각하면 두고 가는 게 되는 얘기지.


미자
같은 원주에 살았는데도 우리가 보고 자란 것들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뱀이라든가, 마을 잔치라든가, 버스정류장 표시가 없는 버스정류장 같은 것들. 진영 님이 본 것들이 지금처럼 창작 활동을 하는 데 영감을 주기도 할까요?

진영
영감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런 추억거리가 있는 거죠. 구체적인 추억이 아니라, 감상 같은 거. 반곡역을 지나서 꼬불꼬불 들어가면 동네가 아늑하게, 동그랗게 있던 거, 그 동네 살았던 사람들... 한 친구가 자기네 집에 놀러 가자고 해서 갔더니, 마당이 그냥 진흙인 거예요. 그런 마당은 처음 봤어요. 마당은 진흙밭에다가 집은 완전 흙집. 방문을 여니까 아주머니랑 아저씨가 누워 계시고, 술 냄새가 확 나던 거. 요만한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고, 소주병이 두 분이랑 같이 널브러져 있던 거. 어두침침한데다 천장도 되게 낮아서 모든 게 다 납작하게 눌린 느낌이었어요. 그 장면이 잊히지가 않아요.
그러고 나서 친구가 자기 방으로 데려갔는데, 침대가 아니라 침대처럼 해놓은 게 있는 거예요. 자세히 보니까 쌀 포대 안에 뭘 채워서 매트리스처럼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그런 집이 있는가 하면 ‘해맑은 마을’ 같은 집도 있고, 대궐 같은 한옥에 사는 친구도 있었고요.

미자
그런 격차가 다 보이는 게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진영과의 카톡
지금은 가늠도 안 되는 진영의 집이 있던 곳을 찾아서
지금은 가늠도 안 되는 진영의 집이 있던 곳을 찾아서
지금은 가늠도 안 되는 진영의 집이 있던 곳을 찾아서

진영

그렇죠. 오래된 동네는 집집마다 서사가 있잖아요. 그런 게 다 가루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동네 주민들 위로한답시고 준 게, ‘반곡동의 오래된 역사’ 뭐 이런 제목의 사진집이었어요. 누구네 집, 누구네 집 이러면서 사진들이 있는데, 그걸 보니까 기분이 이상하게 안 좋더라고요. 농락당한 느낌. 그리고 그 동네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 농사를 지었거든요.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크게 크게 농사를 지었어요. 집 근처에 엄청 큰 배추밭이 있었는데, 볼만했어요. 그렇게 밭을 일구던 사람들인데, 이주를 해서는 대부분 농사를 안 짓는 거예요. 이미 다른 곳은 땅값이 너무 올라 있고, 고령인 분들이 많아 농사 포기하고, 아예 다른 환경의 동네로 많이들 가셨다고 들었어요.


미자

혁신도시가 조성됐다고 했을 때 진영 님은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나요, 아니면 최대한 보는 걸 늦추고 싶었나요.


진영
되게 싫었어요. 기분이 이상해서 싫었어요.
차라리 산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가늠이라도 해보잖아요. 이쯤에 우리 집이 있었고, 이쯤에 길이 있었고... 이런 가늠이라도 하는데, 아예 안 돼요. 아예 다 갈아엎어서 그냥 평지로 만들었잖아요. 왜 이런 식으로밖에 못 할까, 그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이렇게 무자비하게 포맷하듯이 다 밀어버리는 게 과연 맞는 건가, 이런 생각 진짜 많이 했어요.

진영
제가 ‘교차로(지역 내 부동산, 구인구직, 생활 정보 등이 담긴 일간지)’ 다니던 때인데, 하필 혁신도시 특집 지면을 한대요. 그래서 가보니까, 표지판에 ‘혁신로’라고 돼 있는데, 기분이 되게 이상하더라고요. 그때는 건물이 막 올라가고 있고, 필지만 나눠서 길만 나 있고, 부지만 닦아 놓은 상태였거든요. 새롭게 도시를 만드는 중이 아니라 폐허 같았어요.

미래로
세계로

미자

공기관들이랑 아파트들이 다 들어섰을 때는 또 어땠어요?


진영
그때는... 지금도 반곡동 가면 방향치가 되는데, 왜냐하면 저 나름의 나침반이 있단 말이에요, 오래 살던 동네니까. 랜드마크가 아직 있잖아요. 교통방송국이 아직도 있고, 이리로 가면 행구동이고, 이리로 가면 현대 아파트고... 이게 다 있는데, 제가 알고 있던 동네 지표들이 다 사라진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야?”가 되는 거예요. 지레짐작으로 그냥 이쪽 방향에 이게 있으니까 이리로 가면 되겠지, 하고 가면 안 나와.


진영

아직도 그런 말 듣거든요. 반곡동에서 나왔다고 하면, “야, 돈 많이 받았겠다” 이런 얘기해요. 돈을 뭘 많이 받아, 이사 간신히 왔는데. 토지가 많은 사람들은 돈도 많이 받고 갔겠지만, 돈이 위로가 안 되는 분들도 있었을 거예요. 대대로 내려오던 농지를 하루아침에 다 뺏긴 거잖아요. 뱅이둑은 박 씨 집성촌이었어요. 친척들이 다 몰려 살았단 말이야. 그 친척들을 다 찢어놓은 거잖아요.  

원인동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진짜 이렇게 초기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나? 재개발을 좀 다른 방식으로 할 순 없나? 원인동은 반곡동 부술 때와 충격이 비슷했어요. 추월대(과거 원주 원인동 남산에 위치. 강원 감사 이민구李敏求가 이곳에 올라와 치악산에서 떠오르는 가을 달을 바라보며 추월대라고 하였고, 그 뒤 많은 문인들이 와서 추월(秋月)을 바라보며 시흥(詩興)을 돋우었다고 한다. 출처: 두산백과)에 가봤거든요. 너무 웃겼던 게 의미 있는 장소인데, 거기 세운 기념비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행방을 책임 안 지는 거예요. 지정 문화재가 아니니까. 행정복지센터에 전화해서 물어보기까지 했어요. 철거 후 비석을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재개발로 사라진 원인동 '추월대길'.
재개발로 사라진 추월대와 행방이 묘연한 추월대 기념비

진영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인터뷰를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말이 있을까.


혁신도시에 있는 회사를 다녔다. 흔치 않게 정시에 퇴근한 날이면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산동 집까지 걸어오곤 했다. 교통방송국을 지나 봉산동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을 땐 다른 세계로 발을 디딘 기분이 들었다. 혁신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났을 뿐인데, 이런 데가 있다고? 이 집들은 다 뭐야? 낮은 집들, 키 큰 해바라기는 내가 정말 일터에서 벗어났구나, 하는 해방감을 주었다. 확실한 환기가 됐다.

나는 반곡동을 몰랐다. 혁신도시가 되기 이전의 반곡동을 몰랐다. 나의 일터는 누군가의 옛 동네이자 터전이었다. 누군가는 떠밀려 나온 곳이었다.

진영은 반곡동에서 떠나와 신림으로 이사를 했다. 동네에서 제일가는 선소리꾼 황 씨 아저씨는 어디로 가셨을까. 00 엄마는, 희정이는, 저수지에 살던 귀신은...

오랫동안 살던 곳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사춘기를 통과하던 자신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고 진영은 말했다.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라며 진영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또 진영의 입에선 여름날 친구들과 밭에서 파치 수박을 주워 먹던 일, 옆집 어르신이 주름진 손으로 일구던 배추밭, 몇 대를 이어 살던 동네의 기와집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진영의 어딘가에 새겨진 것들이 왜 불가피하게 사라져야 했을까, 여러 번 곱씹었다. 사라지는 게 불가피하다니. 그 불가피함이 마땅한 세상이라, 또 누군가는 자연스레 떠밀려야 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매거진의 이전글 원주 아카데미극장의 쓸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