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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lab Dec 23. 2017

[1부] 부채의 재정의

#67 부채 트릴레마

#67 부채 트릴레마 

- 김형태 지음

꼼꼼하게 3h 


부채를 개혁하고 뛰어넘으려면 우선 부채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부채의 상환 패턴이란 리듬과 멜로디에 주목한다. '세 번은 짧게 한 번은 길게 그리고 빡빡하게' 패턴이다. 부채의 본질을 이해했으면, 여기서 발생하는 부채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단칼에, 부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100% 사기꾼이라고 보면 된다. 부채는 살아 있다. 끊임없이 변신한다. 그래서 살 빼기만큼 부채 빼기도 힘들다. 부채를 둘러싼 생태계가 복잡하다. 부채 생태계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채만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원인과 결과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원인인 동시에 결과인 것이 부채다. -p7




1장 부채를 뛰어넘은 부채 


현재 가계의 부채 위험관리는 중세의 투구 수준이다. 특히 학자금 대출을 사용하는 대학생들은 마치 독일군 기관단총 앞에 선 말탄 근위대 같다. 근위병의 높은 깃털모자처럼 상아탑의 꿈도 크고 미래가 화려해 보이지만 부채 기관단총의 희생물이 되기 쉽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기관단총 총알처럼 부채가 사방에 과도하게 퍼져 있을 경우에는 금리 역시 머리를 내밀지 못한다. 금리 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올리는 순간 채무불이행, 즉 경제적으로 부상당하거나 사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p26 


부채는 상황에 관계없이 고정된 원리금을 상환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태독립적'이다. 지분은 상태 즉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에 따라 지불하는 배당이 달라지므로 탱크의 트랙처럼 '상태의존적'이다. 부채는 바퀴와 비슷하고 지분은 무한궤도와 비슷하다. 바퀴로 비유된 부채는 평탄하고 안정적인 지형에 적합하고 무한궤도로 비유된 지분은 푹 파이고 질퍽질퍽하고 험한 지형에 적합하다. -p28


한마디로 부채의 틀을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학자금 지원제도였다. 설명회를 이끈 학생처장은 새로운 학자금 제도를 소득나눔형 학자금이라고 했다. 학자금대출에 대비해 학자금 지분이라고도 불렀다. 졸업 후 직장을 구하거나 창업을 해서 벌게 되는 소득의 일정 비율(예:3%)을 일정 기간(예:10년) 동안 대학과 나누는 조건으로 대학이 운용하는 기금을 통해 등록금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일종의 지분투자 형태이니 전통적 의미의 부채가 아니다. 부채가 아니니 내가 의무적으로 상환할 부담도 없다. 더욱 좋은 점은 소득 수준이 일정 수준 이하이면 갚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빌 게이츠, 제프 베조스, 앨런 머스크 같은 억만장자가 되면 내 소득의 3%가 엄청나게 커져서 받은 등록금을 크게 초과할 수 있다. -p32


교육전용화폐란 다른 용도로는 쓰지 못하고 교육과 관련된 용도로만 사용되는 화폐다. 원화나 달러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법정통화다. 그 용도 또한 보편적이어서 주권이 미치는 지역 내에서는 원화가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 법정화폐는 거래 용도뿐 아니라 가치저장 용도로도 쓰인다. 화폐가 경제 내에서 잘 돌지 않고 잠겨 있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교육화폐 탈러는 다르다. 순수하게 거래 목적만 있으므로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 가치가 하락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소비하고 순환하고 회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p35


한걸음 더 나아가 대학 입장에서는 무엇이 '활용되지 않고 여분이 있는 자원'인지를 창의적으로 발견해내어 '충족되지 못한 욕구'와 연결해줄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대학교육이다. 창의성을 외치는 시대에 가장 창의적이지 못한 것이 교육과 화폐다. -p37


포틀랜드대학이나  퍼듀대학의 경우처럼 학자금부채 대신 직접 학자금지분 투자를 받아 등록금을 충당할 수 있지만, 아직 연방법이 통과되지 않았으므로 하버드대학이 위치한 보스턴과 매사추세츠주는 이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문기관이 중간에서 학자금부채와 학자금지분을 교환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법대 교수들이 로스쿨 학생들을 위해 제안한 제도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결론은 이렇다. 레프-휴 스왑을 이용하면 법률상으로는 부채를 사용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학자금지분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우험을 투자자에게 이전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직장도 로펌에 국한되지 않고 융통성 있게 결정할 수 있다. -p39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니는 마이크 메릴은 2008년에 자기 자신을 10만주로 나누어 1주당 1달러로 시장에 공개, 즉 IPO했다. 기업을 공개해 주식시장에 상장한 것이 아니라 개인을 공개했으니 이 IPO를 기업공개가 아니라 '개인공개'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겠다. 자신이 앞으로 벌어들일 잠재적 소득에 대한 청구권 그리고 소득과 관련된 자신의 일상생활에 투자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자신을 지분화한 것이다. 공개매각 ㅎ 10일 간, 12명의 친구가 929주를 매입했고 마이크는 그 대가로 자금을 조달했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자기 지분에 대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의사결정, 예를 들어 결혼, 이직, 여자친구 선택, 정관수술, 대학원 진학, 특정 프로젝트, 여행, 게임 소프트웨어 구매, 식단 교체 등에 대해 주주들의 뜻에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p41


틴토레토가 맺은 계약은 지금의 부채와는 성격이 다르다. 나중에 그림을 많이 팔아 소득이 많으면 많이 갚고 적게 벌면 적게 갚는 계약이다. 그러니 채무불이행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해양무역을 통해 돈을 번 신흥부자들은 벤처캐피털 같은 상태 의존적인 지분계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이들은 틴토레토에게 돈을 빌려주면서도 스스로 채권자라기보다는 투자자라고 생각했다. 정 못 갚겠으면 자기나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주면 된다고 했다. 이처럼 융통성 있는 자금조달계약 덕분에 틴토레토는 비싼 물감 걱정 안 하고 마음껏 두껍게 물감을 칠하고 그림의 크기도 키울 수 있었다. ... 이런 융통성 있고 빡빡하지 않은 부채가 없었다면 틴토레토가 자신의 화풍을 개발하고 대표적 베네치아 화가로 후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p47


그렇다면 경제의 노른자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바로 '산 조르지오 은행'이다. 1407년 제노바는 스피놀라 가문이 앞장서고 도시 상인이 중심이 되어 경제의 노른자 기관을 설립하게 된다. 현대적 의미의 은행이라기보다 국가부채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하다. 기본구조는 이렇다. 제노바의 모든 부채를 산 조르지오 은행에 모든 다음 키프로스나 코르시카 섬 같은 해외 식민지 경영권, 흑해 무역권, 소금 판매 독점권, 심지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징세권까지 부여한다. 탈세자를 고문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이렇게 보면 국가에 수행하는 노른자위 기능은 다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독특한 산 조르지오 은행을 '국가 내 국가'라고 불렀다. 정말 기발한 표현이다. -p51


 



2장 부채의 본질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부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고 하니 그역사가 수천 년이 넘었다. 그렇다면 부채는 어떻게 그토록 거칠고 드센 진화의 압력을 견뎌내고 현재까지 융성하고 있을까? 가계와 국가경제는 물론 세계경제를 집어삼킬 듯 넘쳐나고 있을까? 결론은 명확하다. 진화론의 자연선택처럼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부채를 승자로 만들어준 환경요인이 있었다는 말이다. 자연선택처럼 '경제선택'이란 용어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바로 부채에 해당하는 말이다. -p55


부채를 부채로 만드는 본질적 특성은 이 문장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첫째, 부채는 차입자의 사정을 안 봐준다. 융통성이 없다. 반드시 의무적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 부채다. 빡빡하고 깐깐하다는 말이다. 둘째 평상시에는 이자라는 명목으로 고정된 약간의 돈을 정기적으로 갚고 뭉칫돈 원금은 나중에 갚는다. 이자는 돈 빌려준 사람의 기회비용과 나중에 상환받지 못할 위험을 보상해준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자의 지급 패턴이다. 부채의 리듬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작은 이자가 정기적으로 지급되고 만기에 큰 원리금이 상환되는 패턴 말이다. -p55


그렇다면 왜 이런 '몇 번은 약하게 한 번은 강하게' 같은 패턴이 생겨났을까? 돈을 빌려주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정기적으로 받는 이자는 어떤 역할을 할까? 부채의 본질을 연구하는 이론모델 중에서 '상태검증 모델'이 있다. 정기적으로 최소한의 고정된 비용을 들여 건전성을 검증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전체 건전성을 확보하는 방법이고, 이를 자금조달에 구현한 것이 정기적으로 이자를 지불하는 부채라는 것이다. -p57


부채 발전은 시민계층의 권한 확대와 그 궤를 같이한다. '부채 역사는 시민 권한 확대의 역사'이고 '부채 역사는 상환의 의무성 확보의 역사'이기도 하다. 거의 세금처럼 '빵 뜯기기' 일쑤였던 부채가 제대로 상환받을 수 있는 부채로 변한 것은 분명 부채의 발전이다. 당시는 빡빡함이 미덕이었다. 강자에게 가해지는 빡빡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자가 돈을 빌리던 시대에 권력자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환의 의무성이, 상대적으로 약자들이 돈을 빌리는 현대에는 큰 제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서민들을 지나치게 옥죈다고 비난받기도 하는 빡빡한 부채가 시민투쟁의 결과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렇다고 차입자가 자의적으로 갚아도 되고 안 갚아도 되는 부채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부채 혁신의 미래방향은 적절한 상황을 미리 규정해, 그 상황의 변화에 따라 좀 더 유연하고 융통성 있게 변하는 부채를 설계하는 것이다. '최적의 빡빡함'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p64


사냥이 생존의 수단이던 시대를 생각해보자. 내가 오늘 큰 먹잇감을 잡았다고 내일도 잡으리란 보장은 없다. 불확실성이 크다는 말이다. 불확실성과 위험이 너무 크면 '나눔'이 최선의 전략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라 마땅히 저장할 데가 없다. 그냥 놔두면 썩어서 버려야 한다. 이런 시대에는 다른 사람의 위 속에 저장해놓는 게 최고다. 다른 사람 뇌 속에 저장해 기억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래서 잡은 음식을 나누었다. 나눔 위주의 생활이 쇠퇴한 것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저장이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 전쟁도 처음에는 마치 사냥처럼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모두 거는 투자였다. ... 그러다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거의 정례화되면서 전쟁도 비즈니스화되었다. 비즈니스로서의 전쟁은 자금조달 패턴도 정형화되었다. 어느 정도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확보되면 부채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최선이다. 많이 싸게 빌릴 수 있는 왕이나 국가가 승리했다. 나누는 것보다 부채를 부담하고 나머지 전리품은 자기가 모두 갖는 게 유리한 덕분이다. -p67


부채가 사람이라면 새로운 환경하에서 계속 선택받기 위해서 변신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첫째, 부채는 성장 패러다임에 적합한 자금조달 수단이다. 계속 성장하지 못하면 부채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 둘째, 부채의 가장 큰 경쟁력은 자금공급자에게 확실한 수익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자와 원금의 규모와 지급시기가 정해져 있으므로 확실성이 제공된다. ... 셋째, 부채는 '한곳에 성실하게 집중해, 꾸준히 벌고 꾸준히 깊는다'는 패러다임에 적합하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처럼 '느려도 꾸준하게'가 통하는 경제에 맞다. ... 넷째, 과거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며 명예혁명 이후 350년간 세상을 지배해온 빡빡한 부채는 현재의 시대정신과는 어긋나는 면이 있다. 상환의 의무성을 본질로 하는 부채는, 자금차입자가 힘 있는 사람일 때 효과적이다. ... 다섯째, 부채를 못 갚는 것이 예외적 현상이어야 부채가 설 자리가 있지 채무불이행이 잦으면 부채의 장점이 사라진다. 부채에서 채무불이행은 하지 말라고 있는 것이지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p70


르네상스시대의 로마는 교황이,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절대적 후원자였다. 그림뿐 아니라 건축, 조각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공급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이런 절대 권력자가 없었다. 신흥 상인계층이 핵심계층이었고 비즈니스 과정에서 발달된 것이 서로 간의 계약이다. 부채계약도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사람 간의 게약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베네치아의 부채는 특이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정된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그야말로 빡빡한 부채가 아니었다. 부채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듯 느껴지지만, '융통성 있는 부채'라고나 할까. 화가들은 그림 원료를 구매하기 위해 부채를 사용했다. 그림이 많이 팔리면 많이 갚고, 적게 팔리면 적게, 심지어 힘들 땐 이자지급이 연기되기도 했다. 이자를 못 내면 후원자나 후원자 부인의 그림을 그려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베네치아에는 유독 상인 집안에 초상화 그림이 많았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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