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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lab Oct 06. 2017

사람 사는 이야기

#56 세계사를 뒤흔든 금융이야기 


#56 세계사를 뒤흔든 금융이야기 

- 왕웨이 지음 / 정영선 옮김 

쉽게 배우는 2h



왜 금융의식이 중요할까? 작가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의 많은 금융의식은 그럴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 이런 어리석은 의식을 기반으로 한 사고의 모듈은 모호하다. 하지만 잠재의식 속에 우리의 금융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사고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생각'은 원래의 취지와 무관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의식은 사고의 모듈에 영향을 주고 금융사상에 작용한다. 사상이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행위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끊임없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 중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라는 사상의 선택은 실제 행위의 첫걸음이다. -p006 추천사 


금융이 그저 돈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금융은 그저 시장에서 유행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더더욱 버려야 한다. 금융은 사회제도의 수립과 개혁을 상대해야 한다. 미래 세계의 희망은 노동을 통한 가치 창조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부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데 있다. -p014, 추천사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초기에는 농업과 전쟁이 내내 매우 중요한 동력이었다. 농업은 종족 번식과 발전의 기반이었고, 전쟁은 종족 보호와 세력 확장의 수단이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나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신화나 민족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자주 가미된다. 그러나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원해 주는 '돈'이라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최대한 감추려 한다. 돈은 교환의 도구로서 모든 물품으로 바꿀 수 있었고, 심지어 명예까지도 얻을 수 있는 도구였다. 만약 돈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면 이야기가 위인은 천우신조나 능력은 사라져 버리고 그저 보통 사람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돈과 밀접했던 인물이나 이야기일수록 역사에서는 돈과 거리를 두려고 유달리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p27 


초기 화폐의 기능이나 지위는 당시 문명의 발전 경로와 비슷하다. 지중해 문명이 그리스 로마 문명으로 변천한 것은 문명 간의 충돌과 융합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금은광산의 개발과 금은화의 유통으로 특히 화폐에 신권과 왕권을 부여하면서 화폐는 정권과 군사력으로부터 독립되어 국가와 시대를 초월한 표준이 되었다. 화폐는 무역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를 통해 돈은 곧 부를 의미하는 말이 도었다. -p36


금속화폐를 스든 금속으로 태환할 수 있는 지폐를 쓰든, 아니면 지금처럼 전적으로 정부의 신용에 의지한 지폐나 전자화폐를 스든 간에 거래 수요, 비축 수요, 이보다 더 복잡한 수요(이를테면 화폐 수집가)를 결정해 적절한 공급량을 제공하는 것은 모두 복잡한 과정이다. 시장이나 정부는 물론 동종업계도 솔루션이 있을 것이고, 국제적인 협상을 통한 해법도 있을 것이다. 발전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시장이나 정부, 동종 업종은 각기 다른 역할을 한다. 솔루션은 경제 발전, 시장 붕괴, 정부 파산 등 다양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인류사회가 발전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학술적인 관점이나 각종 정책, 효과에 대한 판단은 다이내믹한 금융발전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인류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역사는 여전히 현실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종일관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인플레이션의 원인에 주목하는 이유다. -p047


선진화된 화폐는 정부의 엄격한 통제 속에 시대를 초월하며 사용되었지만, 몇 가지 폐단을 낳았다. 첫째, 화폐와 실물 경제 또는 소비력과의 자연스러운 연계가 조기에 단절되었다. 화폐는 정부의 통치 수단이나 시장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오히려 화폐의 비화폐화를 초래했다. 둘째, 화폐기능이 조기에 소실되자 금융화폐와 법정화폐가 분리되고,, 시장에는 금속화폐가 부족하고 정부는 지폐를 남발해 결국 정부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렸다. 송, 원 정부의 멸망은 악성 인플레이션과 깊은 관계가 있다. 셋째, 경기부양을 위해 선택한 지폐가 눈앞의 이익만 조츤 행위와 대국 부상이라는 환상이 만나 일시적으로는 경기를 부양했는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는 정부와 사회의 신용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악성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프랑스, 독일, 중국은 모두 상처 치유를 위해 오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p 056


주목할 점은 과거 유럽을 정복했던 몽골족이나 오늘날의 집시를 불문하고 바이킹족과 같이 이주의식이 강한 민족은 모두 별다른 금융제도가 없었다. 몽골족이 중원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송나라의 선진화된 화폐제도를 이용해 더 많이 약탈해 결국 악성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무대로 이주하는 유대민족은 모두가 흠모하는 금융 제국을 건설했으니 이는 분명 연구할 가치가 있다. -p075


라파엘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보나텔로, 티치아노 등은 모두 위대한 예술가이고, 메디치 가문은 이들을 먹여 살리는 후원자였다. 이뿐만 아니라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정치가로는 마키아벨리가 있고, 과학자로는 갈릴레이가 있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 세 명과 프랑스 황후 두 명을 배출했고, 그중 한 명은 프랑스 루브르궁 탄생에 일조를 했다. 경제사를 보면, 메디치 가문은 현대 금융업의 시조라 할 수 있다. -p077


금융가와 금융시장의 발전은 금융 이외의 사회적 요인으로 결정된다. 특히 문화의식이 부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사유재산에 대한 정치 법률의 보호, 시대가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어도 상업적 약속과 인문 전통을 계승하는 정신 등의 영향을 받는다. 이런 토양이 없으면 금융의 발전을 논할 수가 없다. -p085


비록 금본위에 대한 논쟁은 뜨거웠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때까지 참전국들은 모두 황금 금수조치와 함께 지폐와 황금의 태환을 금지했다. 이로써 국제 금본위는 해체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금본위제가 다시 부활했지만 황금의 지위는 크게 약화되었고, 일부 국가는 금괴본위 혹은 금환차본위를 시행해 환율의 자동조절 기능은 더 제한되었다. 1929~1933년 대공황 시기 영국은 더 이상 세계 패권국이 아니었다. 국제수지가 악화되지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중단했다. -p095


유대인은 선택의 여지없이 무역이나 금융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전역에 퍼져 있는 이동 네트워크를 이용해 환전이나 대출 거래를 빠르게 발전시켰다. 13세기에서 14세기 무렵, 통제가 덜한 이탈리아 북부의 제노바나 피렌체 지역에서는 시중은행 지점을 개설하기도 했다. 그들은 소액은행을 만들어 현지 환전이나 귀금속담보대출 업무를 했다. 인ㄴ 중국의 전장에서는 국제무역 환전이나 정부, 교회 같은 공공기관과 상점을 상대로 장기융자를 제공했다. 이는 중국의 표호와 유사하다. 분산경영이 이루어지는 다른 업종과는 달리 금융네트워크를 장악하게 된 유대인은 돈을 벌고, 시장의 수요를 파악하고, 리스크를 헤지하고, 폭리를 취하는 등 해당 영역에서 입지가 강화되었다. -p100


사실 고리대금은 완전히 근절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중세 시대 1000년 동안 교황이 계속해서 금지령을 선포한 것이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다양한 신용대출 도구를 만들어 다른 비용이나 서비스를 통해 이자를 받았다.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는 계약서를 이중으로 만들어 존재하지 않는 서비스에 대해 이자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이중계약서의 기원이다. -p122


흥미로운 점은 1642년 교회는 고리대금업자에 맞서기 위해 전당포를 만들어 소비자와 생산자가 물건이나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하고 원가 정도의 이자를 받았다. 지금의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과 유사한 형태다. 교회의 간섭과 세속의 저지에도 고리대금업은 사라지지 않았다. 현대적인 은행이 발전하고 다양한 금융 상품이 소개되고 많은 소비자와 생산자가 금융을 이해하고 선택과 흥정 노하우를 터득하자 고리대금업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에는 도덕적인 단어로 변했다. -p123


금융위기 때마다 언론에서는 과거 발생했던 3대 금융버블 사건을 언급하며 대중을 교육한다. 네덜란드의 튤립투기 사건, 프랑스의 미시시피 회사 사건, 영국의 남해 회사 사건이 그것이다. 교과서나 언론에서는 3대 사건을 모두 정부가 감독을 소홀히 한 틈을 타 소수의 사기꾼이 만들어 낸 덫에 대중이 걸려들어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과 경제 파탄을 초래한 금융과 사회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역사적인 경험에서 보듯 정부가 관리감독을 강화해 부적절한 금융행위를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00년 동안이나 홍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3대 버블 사건은 더 광범위하고 큰 규모의 비극적 사건을 예방하지 못했다. 이는 분명 다시 한 번 역사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p125


솔론이 아테네에 민주제도의 기초를 수립할 때 노예제도는 매우 보편적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유공민, 노예, 농노, 공민권을 박탈당한 공민, 다시 자유를 얻은 노예 등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없는 평민은 채권자의 노예가 되었다가 빚을 다 갚으면 평민신분을 되찾았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노예가 노동을 하는 사회를 통틀어 '노예사회'라 부르고 이를 인류 진화의 필연적 단계라고 규정한다. 경제학과 정치학 관점에서 보면 이는 비판적 정서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복잡한 사회생태계를 인위적으로 주인과 노예간의 계급투쟁으로 단순화했기 때문이다. -p137


노예무역으로 인구가 유입된 미주대륙은 고속성장의 기회를 맞았다. 금은광과 식물재배업이 전 세계 시장의 도움을 받으며 300여년 동안이나 발전했고, 덕분에 견고한 부의 기반과 시장제도 기반을 마련했다. 노예무역이 폐지된 후 약 100년 동안 세계 각지의 우수한 인재들이 미국이나 북미 지역으로 이주했다. 물론 노예무역이 아프리카에는 정반대의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미국대륙이 노예제도에 대해 반성을 해도 아프리카 대륙이 느끼는 분노를 잠재우지 못한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경제의 기형적인 발전을 초래했꼬, 그 영향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p143


한 영국 학자는 노예무역이 구미국가 산업과 식민지 산업의 기초이며, 서유럽과 식민지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예무역 덕분에 많은 노동력이 식민지에 투입되어 산업에 필요한 각종 원료를 생산했다. 마찬가지로 산업에 필요한 세계무역을 만들어 냈다. 활발한 상업활동으로 축적된 상업자본이 증대됨에 따라 산업혁명의 토양이 만들어졌다. 구미의 산업혁명과 교통, 운송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무역으로 얻은 이윤 덕분이었다. 서인도 제도는 영국 식민지의 중심이자 경제의 근원지였다. 노예무역과 세계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도시가 발전했다. 영국의 리버풀과 런던, 프랑스 낭트 등 서유럽에서 번영하고 발전한 도시 대부분은 노예무역과 관련 있다. 노예무역으로 서유럽과 북미는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p144


전쟁은 아편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청나라 정부의 도덕과 정의 인식과 맞물리고 동시에 제국주의와 아편을 하나로 묶은 혁명사고와도 부합해 서양의 이데올로기조차 '정신적 아편'이라 정의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아편과 백은은 모두 중국과 유럽이라는 전혀 다른 의식과 제도가 치열하게 대립한 표현의 도구였을 뿐이다. 바로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이었다. 오랜 기간 기물에 얽힌 기억과 발산은 제도와 관련된 원한이나 편견을 더욱 강화해 우리가 맞이하는 새로운 관념이나 제도, 문명과의 융합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p154


여러 학자의 연구를 보면, 산업혁명에서 철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럽의 주요 국가는 거의 모두 철도를 통해 산업혁명을 추진했다. 다른 국가보다 산업화가 조금 늦게 시작된 독일의 경우, 1850~1860년대에 이르러 영국이나 프랑스의 산업 발전 속도를 앞섰다. 1850~1869년까지 독일의 연평균 성장률은 10.2퍼센트였고, 같은 기간 프랑스는 6.7퍼센트였다. 영국은 1849~1870년까지 5.2퍼센트에 불과했다. 철도는 독일이 부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의 최초 철도는 1835년에 건설되었다. 뉘른베르크에서 퓌르트에 이르는 길이 6,000미터의 철도이며, 1839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까지의 철도가 완공되었다. 1869년, 독일철도는 총 길이가 1,770만 미터에 달했고, 그중 프러시아가 1,000만 미터를 차지했다. 독일의 산업발전 속도와 철도발전 속도는 정비례했다. -p202


서양의 '남해 버블', '튤립 버블', '폰지게임' 사건이나 현재의 메도프 사건 혹은 중국의 각종 자금조달이나 투기사건은 모두 자본시장의 내생적 현상이지 언론의 보도나 법률적인 판단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옛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온고지신은 끊임없이 성숙해지는 자본시장의 메커니즘이다. 이런 사건이 수차례 발생했고, 사건마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 중국의 자본시장은 안팎으로 융자의 압력에 직면한 상황에서 지도자들이 만들어 낸 결과다. 더욱이 중국 각계각층의 투자자와 창업자들은 계속해서 창조의 결과에 참여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투자자나 감독관들이 자신의 지혜나 능력을 너무 과신해 과거 역사를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후세인들이 역사의 전철을 반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잘못이다. -p222


관점을 조금 달리해서 보면, 돈은 사실 정치 변혁의 중요한 지렛대다. 쑨원의 혁명 노선도 대규모 민간 자본에 의지했고, 장징장이 첫 번째 공로자다. 저장 후저우의 부유한 염상 집안에서 태어난 장징장은 중국에서 최초로 국제무역을 해서 돈을 번 상인이다. 20세기 초, 장징장은 쑨원과 동맹회 활동을 후원했고, 후에 국민당 주석직을 맡아 국민당 4대 원로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장징장은 상인의 ㅏㄴ목과 자신만의 장점으로 '황금 10년'이라 불리는 1928~1937년 동안 중국대건설 사업을 주도했고 현대 중국 철도, 도로, 전력, 통신, 에너지, 시정부 건설 등의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p254




나는 왜 금융박물관을 건립하려 하는가? 나는 배움과 도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현실과 미래에 도전하듯, 나도 열정으로 이 모든 것을 경험했다. 되돌아보면 역사에 도전한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금융을 이해하고 역사를 사랑하며 실행력이 있다. 이것이 내가 가진 기본 조건이며 따라서 유쾌한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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