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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다 Jul 27. 2021

헤엄의 미학

수영 한 달 차의 짧은 기록


 삶을 통틀어 이토록 운동을 길게 한 역사가 없다. 또, 운동에 이토록 흥미를 느낀 역사 또한 없다. 그랬던 내게 수영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하고 많은 운동 중 왜 수영을 택했냐 한다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첫 번째는 물속에 빠질 일이 생긴다면 살고 싶었고, 두 번째는 친구의 적극적인 추천이었다. (거의 강요에 가까운 추천이었지만 덕분에 내 얄팍한 의지에 도화선이 됐다.)


 대학 졸업이 꽤나 지난 시점에서 무언가를 처음 배운다는 건 제법 설레는 일이었다. 적당한 긴장과 과한 자신감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사실 난, 수영을 배우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수영 영재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속에 호기롭게 뛰어들어 눕고 잠수하고 어설프게 헤엄치던 날들이 그 증거였다. 난 배운 경험이 없을 때도 그럴싸하게 해냈으니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면 물과 하나가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이는 갈수록 확장하여 내 뜻과는 달리 수영에 지나치게 집중된 재능 탓에 장래를 바꾸게 되는 상상으로 뻗어나갔다.


 그 상상이 망상이었음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이틀이다. 강습 이틀 차 만에 수영장 물을 잔뜩 마신 탓에 물배를 채우고 집에 걸어가며 생각했다. '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열심히 해야지 흉내라도 낼 수 있겠구나.'


 어떤 일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는 일은 언제 겪어도 허탈하다. 특히 나처럼 스스로를 맹신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근사한 경험을 한다.


 주말에 혼자 연습하기 위해 수영장을 찾은 날이었다. 나를 가만히 보던 한 아주머니는 내 몸짓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어려웠던 모양인지 코치를 자처하셨다. 아주머니는 50m 왕복을 마친 내게 와 말했다. "숨 마실 때 고개를 너무 높이 들어서 자세가 흐트러지고 있으니 살짝만 틀어서 해봐. 그것만 고치면 잘하겠구만." 내가 수영하는 모습을 자세히 뜯어보고 지적한 뒤, 당근까지 잊지 않는 무심한 다정이었다. 그 순간 아주머니는 내게 강사만큼, 아니 그보다 더 전문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게 어디 있겠나. 살짝만 틀어서 숨을 마시려다가 또 물을 잔뜩 들이킨 내가 거친 숨을 쉬며 "말씀하신 대로 하면 물을 너무 많이 마셔요."라고 하소연하자 돌아온 대답은 섬뜩한 것이었다.

"여기 수영장에 있는 물 다 마셔야 수영 잘할 수 있어."

물 마실 때마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던 내게 이 말이 얼마나 위협적으로 들렸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동시에, 어쩐지 열정을 부추기는 면이 있어 참 묘한 구석이 있는 거다.

무식할 정도로 꾸준히, 또 열심히. 재능으로 중무장했다면 등한시했을 게 뻔한 이 태도의 가치를 빛내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보질 것 없는 내 수영 실력에 애정을 가지게 된 계기다.


 그렇게 수영 한 달 차가 된 나는 당연하게도, 여전히 부족하다. 여지없이 물을 마시고, 헛구역질하고, 자주 서툴게 하다가 가끔씩 그럴싸하게 헤엄치고 있다.

이 지리멸렬한 과정까지도 즐기게 된 건, 수영장 물을 다 마실 정도로 시간이 흐른 뒤 헤엄치는 나를 보았을 때, 그 모양이 어떻든 나 자신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랑스러울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부지런한 헤엄의 미학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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