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데 누가 자꾸 팔을 툭툭 건드렸다. 인웅이 형이었다. 얼마나 부지런한 스타일인지, 아침으로 먹을 토스트 재료를 사러 가자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오늘 일정은 오후 2시까지 푹 자면서 나의 피곤함을 달래는 것이었으나, 인웅이 형을 이길 수 없던 나는 순순히 게스트 하우스 밖으로 끌려 나왔다.
모스크바 도심의 아침, 거리의 공기는 즐거운 여행의 기분과 상반되는 매연으로 가득 차있었다. 러시아의 수도이긴 한가보다. 숙소의 바로 옆 건물에 붙어있는 마트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토스트 재료를 구매했다. 추운 날씨에 롱 패딩을 꼭 감 싸매며 부리나케 숙소로 들어온 우리는, 거실에 앉아 인웅이 형이 만들어준 토스트로 아침 배를 채웠다.
오늘 계획은 저녁 7시에 볼쇼이 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 전에는 딱히 계획이랄 것도 없다. 그냥 잠이나 실컷 자고 싶을 뿐이었다. 하하, 내가 여행을 하러 온 건지, 먼 곳으로 잠을 자러 온 건지. 빈둥거리는 여행이었지만, 꽤나 만족스럽기도 하다.
밥을 먹고 숙소에서 빈둥대며 인웅이 형과 보드게임을 즐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와 인웅이 형은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현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던 인웅이 형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영화관이 있었다. 인터넷 검색으로는 정오쯤에 우리나라 영화인 '설국열차'를 관람할 수 있었다. 오와, 추운 겨울, 횡단 열차를 타고 눈 덮인 평야를 달려온 우리에게 꽤나 안성맞춤인 영화인 듯하다.
근처 영화관에 도착했고 모스크바의 영화관은 꽤 깔끔했다. 하지만 영화관의 분위기는 우리나라와 사뭇 달랐다. 설국열차를 예매 하가 위해 러시아어로 되어 있는 무인 발권기 앞에 서서 이것저것 눌러보며 예약을 진행해 나갔다.
오후 12시 30분에 상영하는 영화 설국열차를 보려고 찾아왔는데, 이럴 수가.. 설국열차는 오후 12시 30분이 아니라 돌아오는 오전 12시 30분 (00시 30분)에 상영하고 있었다. 잠깐 어이를 상실해 버린 뒤에, 매표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영화를 구경했다. 마침 1분 전에 시작한 러시아 흑백영화가 예매가 가능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영화를 보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끔찍할 것 같아, 얼른 예매를 진행했다. 영화 관람비는 한 사람에 150 루블이었다. 150 루블이면 3000원인데..? 영화가 이렇게나 저렴하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의구심은 없었다. 그때 우리에게 저렴한 건 좋은 거였으니까.
러시아 영화관의 상영관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매점을 먼저 지나야 했다. 매점을 지나며 영화를 볼 때 마실 음료나 간식을 사서 계산을 하고 나오면 영화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가면 영화관으로 입장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마실 콜라를 하나씩 샀는데 웬걸, 콜라 값이 하나당 150 루블이었다. 영화 관람료와 콜라 값이 같다고...?
상영관에 들어가니, 영화는 갓 시작되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영화관은 텅 비어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자리를 찾아가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자리에 앉아 영화를 시청했다. 러시아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는 연기자의 표정과 목소리톤 그리고 분위기로 시청할 수밖에 없었다.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흑백영화를 기대하고 들어갔지만, 우리나라의 독립영화를 보는 듯했다. 영화의 분위기와 촬영기법도 옛날 영화의 느낌으로 가득했다.
열심히 내용 이해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인웅이 형이 지루해하는 것 같았다. 그냥 나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웅이 형이 모자를 쓰는 것을 확인한 후 영화관에서 일어섰다. 2시간 13분의 러닝타임이었지만 끝내 끝까지 관람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집중해서 보다 보니 1시간이 훌쩍 넘어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 기대했던 것 설국열차 같은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시간이 조금 지루 하기는 했다. 그렇게 우리는 러시아의 극장 분위기를 한껏 느낀 후 극장 밖으로 나와 다시 숙소로 향했다. 시간은 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고, 나는 아침부터 이리저리 움직인 탓에 조금 지쳐 다시 숙면을 취했다.
3시쯤 되었을 때 나는 오페라를 보러 가기 위해서 일어나 오페라에 입고 갈 블레이저와 슬랙스를 다리미로 다린 뒤, 샤워를 했다. 인웅이 형은 다른 여행가와의 약속으로 먼저 나간 뒤였다. 5시가 되었을 쯔음 밖으로 나와 볼쇼이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볼쇼이 극장은 러시아 화폐 100 루블 뒷면에 그려져 있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극장 중 하나다. 볼쇼이 극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은 극장인데, 전쟁 당시 주택가로 위장하여서 테러를 겨우 피했다고 한다. 엄청나게 큰 볼쇼이 극장이 어떻게 주택가로 위장할 수 있었을까…?
극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극장 및 주위 건물들은 예쁘고 반짝이는 불빛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볼쇼이 극장 앞은 여러 가지 아름다운 조형물로 꾸며져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사진 찍기 좋은 명소인 것 같았다.
극장 티켓을 교환하려면 낮에 극장에 들려서 교환해야 했는데, 우리는 QR코드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극장으로 찾아갔다. 극장은 공연시간 1시간 전부터 중앙문을 열어준다. 웅장한 볼쇼이 극장의 문이 열렸다.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몸수색을 실시한다. 몸수색을 마치고 티켓 표를 확인받은 뒤에 들어가면 한 계단 아래에 외투를 맡길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외투를 맡긴 후, 가벼운 옷차림으로 볼쇼이 극장을 돌아다녔다. 여러층으로 나뉜 볼쇼이 극장을 돌아다니면 간식을 파는 라운지도 나오고 넓지는 않지만 마치 개미굴처럼 이곳저곳 방들이 많았다.
러시아에는 “밥은 굶어도 공연은 관람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세상에 그냥 있는 소리는 없는 것처럼 깔끔하고 아름답게 차려입은 러시아 사람들은 모두 극장 안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넓고 높은 볼쇼의 극장 안의 좌석들은 한 자리도 빠짐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극장 안의 금빛 샹들리에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셨고, 금으로 장식이 양 옆 테라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한 동안 극장을 눈에 담기 위해 멍 ~하니 아름다운 극장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페라는 시작했다.
총 3시간 30분의 러닝타임 (중간중간 쉬는 시간 15분씩 2번)이 지났다.
이번에 오페라를 처음 봤는데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연기자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하모니에 한 순간도 졸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이 공연을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이 모여드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러시아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더 재미있는 오페라 공연이 되었으리라. 내용을 이해하긴 했지만 가사의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러시아어에 대한 학업 욕구가 불타오르는 순간이었다. 3시간 3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조금 버겁기는 했지만, 언어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한 순간도 지루해하지 않고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공연 뒤로 돌아가자 엄청나게 큰 드럼 소리가 우리를 맞이했다. 거리에서는 버스킹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많은 인파가 모여있었다. 큰 키의 러시아 사람들을 파고 들어서 비로소 우리는 드럼을 치고 있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오페라를 보고 문학적 감명을 받았다면, 길거리 드럼 공연은 아주 신나고 흥이 넘쳤다.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드럼에 맞춰 길거리에서 춤을 췄고 우리는 소심하게 리듬만 타며 드럼 공연을 즐겼다. 오랜만에 드럼이 진짜 멋있는 악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모스크바의 밤은 여기저기 열리는 공연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다. 극장에서의 공연, 길거리에서 공연, 지하철에서의 공연, 크리스마스 마켓에서의 공연, 엄청나게 많은 공연들이 모스크바의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누군가가 모스크바는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반짝이는 불빛과 여러 가지 공연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