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가는 날이다. 출국 3시간 전 잠에서 깨어 준비를 시작했다. 딱히 챙겨야 할 건 없었다. 가져온 라면과 같은 식품과 물품들을 열심히 사용하다 보니, 캐리어가 확실히 가벼워져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준비를 마치고 숙소 앞에서 택시를 탔다. 하, 드디어 집이구나.
아니, 아직 집이 아니지. 모스크바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엄청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야 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지옥 같은 비행시간이 두려웠던 나는 알마티 스탑오버라는 프로모션을 알게 되었다. 직항으로 가지 않고,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 하루 머물러 가는 프로모션이었는데, 4성급 호텔을 우리 돈 천 원에 이용할 수 있는 프로모션이었다. 세상에 이런 꿀 같은 이벤트가 있을 줄이야. 약 5시간 정도만 비행하고, 편안한 호텔에서 하루 쉬었다가 다음날 다시 5시간 정도만 비행하면 우리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일 차(01/21) 11:40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 출발 >
20일 차(01/21) 19:45 알마티 도착 >
21일 차(01/22) 14:15 알마티 출발 >
21일 차(01/22) 22:50 인천 도착
이라는 완벽한 일정의 계획이었다. 공항 왕복에, 조식까지 무료라니 최... 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에어아스타나 항공편을 이용해 경유지인 알마티에 도착했다. 항공편이 조금 연착되긴 했지만 에어아스타나 항공기 내부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엄청 편안한 허리베개와 이코노미석이지만 널찍한 좌석 그리고 기내식이 너무 맛있었다. 치킨 파스타와, 버터 빵과 샐러드, 그리고 여러 가지 초콜릿이 함께 나오는데 너무 맛있어서 잠시 동안 쉴 새 없이 먹기만 한 것 같다. 사진을 못 찍어서 아쉽다. 너무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었다.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다가 알마티에 도착했다.
와우, 우리에게는 캐리어도 없었다. 짐을 모두 인천으로 한 번에 보내 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 그리고 노트북은 어떻게든 들고 다녀야 했다. 알마티에서 편하려고 캐리어를 인천으로 보내버렸는데,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로비로 나오니, 우리 이름이 영어로 적힌 피켓을 가지고 서 있어야 할 픽업 기사님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아 헤매다가 결국 에어아스타나 전용 인포메이션에 도움을 청했다. 홀연히 사라졌던 공항 직원은 얼마 뒤에, 픽업 기사 아저씨를 데리고 나타났다. 어디 계셨던 걸까..? 역시, 여행이 조금 막힌다 싶으면 바로 인포메이션에 문의하는 게 최고다.
픽업 서비스를 받아 도착한 셰라 호텔,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들어왔을 때 너무 이쁘고 넓고 쾌적한 호텔에 감탄했다. 침대도 너무 푹신푹신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이렇게 좋은 호텔을 천 원에 하루 묶게 해 준다니.. 미쳤다. 너무 좋아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조식 먹고 헬스하고 사우나를 가서 샤워를 한 뒤 다시 한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알마티 스탑오버 홀리데이 최고다. 호텔의 로비에서 한국어가 들려서 쳐다보니, 알마티의 스키장으로 놀러 온 한국인 여행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푹신한 침대와 컵라면, 그리고 맥주뿐이다.
갑작스럽게 떠났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 혼자서 풍요롭고, 여유롭게 떠나려고 했지만 어쩌다 보니 세명이 되어 어리둥절했던 여행이었다. 여행 에세이를 쓰겠다고 다녀왔던 여행이기도 했는데, 1월에 떠났던 여행의 종지부를 12월에 찍게 되었다. 다녀오자마자 여행 에세이에 집중했다면, 좀 더 따끈한 여행 에세이를 쓸 수 있었을 텐데, 게으른 배짱이의 최후다.
아무튼, 항상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여행을 하고 나면 나 자신이 성장한 느낌을 받는다. 좀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기도 하고, 다음 여행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삶의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3주간의 타지 생활에 몸과 마음은 많이 지쳐버렸지만, 집에 돌아와 한 숨 자고 나면 금방 다시 활력을 찾게 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지난 3주간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느새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아직도 나는 행복하고 새로웠던 러시아의 추억을 순간순간 생각한다. 여행 중 만났던 친구들과 가끔 연락을 주고받을 때면, 그때 그 친구와 함박웃음을 지으며 떠들었던 장면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코로나 19라는 커다란 재앙에 나의 여행은 잠시 멈춰버렸지만, 추억으로의 여행이 나를 계속 두근거리게 한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행에는 늘 '새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떠나든 일상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에 나는 열광한다. 특히 새로운 장소, 그 속의 아름다운 유적들과 건물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 알아들을 수 없는 새로운 언어들.
그 속에 더욱 뜻깊은 새로움도 있다. 가까웠던 친구들의 새로운 모습들이다. 같이 여러 가지 역경들을 헤쳐나가면서 만난 친구들의 모난 모습, 놀라운 모습, 힘이 되어 주는 든든한 모습 등을 겪고 나면 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까지 생겼으니, 내 삶에 무시할 수 없는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여행이 끝났을 때, 친구들에게 미안했던 일들만 주야장천 떠오른다. 그때 좀 더 참을걸, 더 유하게 얘기할 걸, 융통성 있게 행동할 걸. 후회해봤자 소용없지만, 후회스러운 감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행이 끝나고 헤어지기 전에, "그때 미안했다"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고 싶었지만, 용기 내기가 쉬운 게 아니었다.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가 내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나? 있겠지 뭐.
아무튼 온통 새로움으로 가득한 여행을 함께해준 친구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인웅이 형, 성진아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