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도 비상금이 필요하다!
엄마의 직업을 적으시오. 라고 쓰여 있는 아이들 입학지원서 종이에 나는 무직이란 단어를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그냥 주부라고 적는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살림과 육아를 하는 주부가 직업이다. 그리고 남편의 월급날마다 약속한 한 달 생활비를 받는다. 통장에 이체받아 찍히는 액수가 내 나름대로는 월급인 셈인데, 말이 월급이지 가족들 식비와 생필품을 사고 나면 남는 게 많이 없기 때문에 온전히 내 돈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느 날 잠시 육아휴직 중인 친구가 말했다. “친구야, 돈을 벌다가 잠깐 쉬니까 진짜 숨만 쉬어도 돈이 빠져나가. 삼시 세끼 먹는 거, 아이들 데리고 나갈 때마다 쓰는 거, 하다못해 집에서 불 켜고 티브이 보는 전기세 화장실 갈 때 쓰는 휴지도 다 돈이야.” 그 말을 들으니 결혼 이후로 뭔가 가만히 있는데 소비적인 것 같은 나의 처지가 새삼 실감이 났다. 소비하는 건 아닌데 늘 돈이 없다. 돈이 없어 불안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아무 생각 없이 심지어 나도 모르게 돈을 쓰고 있다.
남편이 좀 타이트하긴 해도 인색한 편은 아니다. 이번 달에는 이러이러해서 돈이 더 들어갔다고 설명하면 아주 방실방실 웃으면서는 아니어도 못 이기는 척 더 보내준다. 모든 생활비를 받는 주부 중에 나는 보통 정도라고 생각한다. 넉넉한 마나님 같은 생활은 절대 아니어도, 아이가 마트에서 과자를 사 달라고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인심을 쓴다.
하지만 뭔가 나도 모르게 혼자서 보는 눈치가 있다. 매번 생활비보다 돈이 조금씩 더 들어가는데, 이게 너무 억울하게도 내가 쓴 돈은 아닌데 장황한 설명을 하며 설득하는 상황이 부담된다. 게다가 그렇게 받아내도 생활비는 항상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다. 일단 내 생활비는 물가상승률이 그때그때 반영되는 게 아니다. 관리비 학원비 보험료 전기난방비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돈은 항상 고정 이상으로 증가하는 데다가, 그때 그때 필요한 현금과 주유비 생필품 같은 카드비를 조금 쓰고 나면 언제나 오버가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분하다.
여기서 나는 생각에 잠긴다. 나는 소비나 사치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어찌어찌 매달 수문을 잠그는 기분으로 꽉꽉 조여가며 산다. 근데 돈이 없다? 돈이 없는데. 애들이 커가면서 들어갈 돈이 더 많을 텐데 이런 방식으로 계속 생활 유지가 가능하겠는가? 여기서 잠깐. 우리 가족의 자산이나 모으는 돈은 남편이 관리하므로 저축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어쨌든, 그래도 가끔씩 애들이 엄마 게임팩 사주세요. 엄마 수학 인강 듣고 싶어요. 라던지 하는 돌발 지출이 커질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생각한 비상금 라이프를 위해서는 소득의 증가와 절약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상식적으로도 돈을 더 가지던지 덜 쓰던지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방법론적으로는 막막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스크루지 님의 ‘회사 언제까지 다닐 거니?’란 책을 읽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재테크를 게임으로 비유한 구절이 인상 깊었다.
일단 미네랄부터 캐자. 예금과 적금으로 투자금을 모아 재테크를 실행해 나가기 위한 종잣돈을 만들자. 그리고 추가 멀티를 통해 파이프라인을 늘리자.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내 기지 안에서만 활동하면 안 되니 경제 동향을 정찰하며 현재 상황을 파악하자. 그리고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공격력과 방어력을 업그레이드해 나가면서 계속 강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재테크는 ‘소득(월급), 급여 외 소득(사이드잡), 자본소득(투자)’라는 세 가지 모두 균형 있게 갖춰야 한다.
소득의 증가는 현금벌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 사업이나 근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끔씩 사장님 도와주고 받는 일당 말고, 아예 정규직으로는 시간이 필요하다. 3월부터 어린이집 다니기 시작한 셋째 덕에 4년 만에 내 시간이 생긴 참이다. (친정 시댁 4시간 거리) 이제 겨우 하루 몇 글자 써 볼 시간과 기력이 생겼는데 정규직이라니. 지금의 체력으로는 진 빠져서 돈을 더 많이 쓸 듯한데, 워킹맘들 정말 존경스럽다. 그래서 1년 정도는 휴식 및 취업 알아보기를 할 생각이다. 결론적으로 당장 돈을 버는 게 아니니까 재테크 공부만 뒤적뒤적하며 미래를 꿈꿔본다.
그러니 나의 유일한 현실적인 소득증가는 자잘한 얻어 타는 소득이다. 남편에게 갖은 애교를 부려 생활비 협상에 들어가지만 번번이 실패하기에 이판사판 내기도 한다. 가끔씩 내가 아는 지식을 뽐내며 서로 싸우다 몇만 원 내기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질 때도 많아서 리스크가 크다. 한 번은 인하대가 인천 하버드 대학의 줄임말인 줄 알고 우겼다가 내기에 졌다. 하와이 대학교였다. 오히려 생활비가 깎인 나는 씩씩대며 중고장터에 물건을 팔아보기로 한다. 읽은 책을 팔거나 소형가전을 팔면 조금은 쏠쏠하다. 내가 팔기도 하지만 찾다 보면 좋은 장난감이나 옷을 물려받기도 한다.
현재로선 소득증가여부와 관계없이 절약이 답이다. 절약은 무조건 중요하다. 재테크를 한다고 해도 종잣돈이 필요하니 부자들도 절약은 기본이라고 한다. 나도 어떻게든 소득을 늘려보려고 눈치작전을 펴다가 결국 이 쪽이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말이 거창해서 그렇지 노력한다면 한 푼이라도 줄여볼 수 있는 절약. 정보 찾기와 머리 굴리기를 동원해 몇 가지 절약실천 팁들을 정리해 본다.
절약실천 팁 첫째. 식비 줄이기. 우리 집은 식비가 가장 많이 들어간다. 글을 쓰면서도 주섬주섬 먹고 있으니 살짝 뜨끔하긴 하다. 건강하게 먹는 게 좋으니 지나치게 가공품에 의존하지 않도록 관리하자. 일주일 한 달 단위로 뭘 살지 뭘 먹을지를 미리 기록해 두면 좀 더 영양 잡힌 식단도 가능하고 구매비용도 줄일 수 있다. 장을 보러 갔을 때 충동구매하지 않도록 배를 채워두는 것은 이미 유명한 얘기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밑반찬을 만들어두고 재료를 다듬어두면 필요이상 외식하는 비용을 절약하게 된다.
둘째 필요한 물건은 장바구나 넣어두었다가 3일 있다가 사기. 지금 당장 써야 하는 생필품 말고, 평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가지고 싶은 물건은 일단 장바구니에만 넣어둔다. 일명 미리 쟁여두는 물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직 20프로 남았지만 모자라기 전에 미리 사두자 하는 물건들 중에 의외로 하나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니 마지막 5프로 내외로 남을 때까지 일단은 버틴다. 가지고 싶은 물건도 마찬가지다. 장바구니에 물건을 쌓다 보면 장바구니만 2,3백만 원이 넘어가도록 무거워지는데, 반드시 한 번씩 장바구니 비우기 날을 만들어 며칠 지나니 흥미가 없어진 것들을 싹싹 비워줘야 한다.
셋째 이미 있는 물건과 겹친다면 사지 않기.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일단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대체가능한지 생각해 본다. 노트가 필요하면 A4용지 이면지 묶음을 쓰고, 음료 캐리어로 수납함을 만든다. 그리고 어떻게든 고쳐 써야 한다. 의외로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물건이 많다. 큰 옷은 작게 수선하고, 살짝 뜯어진 물건은 안 보이게 잘 붙인다. 바느질 몇 번 테이핑 몇 번으로 다시 쓸 수 있는 물건이라면 한 번만 더 재활용해본다.
지금까지 열심히 정리는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노력이다. 백날 적고 다짐해봐야 한 번의 작은 실천이 더 도움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오늘은 어제 장 봐둔 채소와 생필품들을 소분해서 쓰기 좋기 만드는 일을 해둬야겠다. 언제나 물건이 쓰기 편한 상태로 만들어져 있다면 나도 지쳐서 필요 없는 음식이나 물건을 사게 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천천히 노력하면서, 언젠가 나도 비상금을 들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될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