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보통 차례라던지 양가 어른들과의 식사라던지
요즘에는 해외여행이 해당하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또 한가지가 더 있다.
바로 가족들과 함께하는 '놀이'이다. 주로 윷놀이와 고스톱을 하게 되는데,
매년 다른 양상으로 플레이가 진행되면서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있다.
이번 명절도 예외는 아니다. 성묘를 다녀와서 차례 음식을 나눠먹은 뒤,
시댁에 있던 우리는 윷을 들고 온가족이 둘러 앉았다.
아버님과 우리 부부, 윷놀이는 몰라도 막대기 네 개는 집어 던질 줄 아는 막내까지
자식 셋 총 여섯이 모두 함께다. 참고로 큰소리가 나지 않도록 바닥은 매우 두툼하게 까는 게 필수다.
아이 둘은 깍두기로 끼워넣고 아버님과 큰딸이 한팀이 되고, 나와 남편이 한팀이 되어 윷놀이를 시작했다.
윷놀이란 무엇인가. 4개의 윷가락을 던지고 결과에 따라 말을 이동시켜 승부를 겨루는 놀이다.
간단하게 보이지만 승리하려면 전략적인 사고와 행운이 모두 필요하다.
게임 내 확률요소로 인해 확실한 승리 전략이 없기 때문에 운이 꽤나 큰 요소이다.
우리나 저쪽이나 던지는 수준은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 잡고 잡히며
아슬아슬하게 경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슬슬 경기에 열이 오르며 판세가 요동치려고 할 즈음이었다.
큰딸이 윷을 들어 별 생각 없이 던지려는 순간 갑자기 아버님이 제지하신다.
"말판을 잘 보고 생각하자. 이번엔 윷이 나와야 된다."
"던지는 대로 나오는 것 뿐인데. 너무 부담되는 데요??"
10살짜리 큰딸이 살짝 주춤하자,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아버님이 말하신다.
"아니야, 아니야. 윷은 쉬워. 윷은 매우 쉬워. 그냥 윷만 생각하고 던져."
"네? 그건 좀."
이쯤되니 지켜보던 남편도 아니 애한테 무슨 부담이에요.
그냥 던지라고 하세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잠시 숨을 고르고 윷을 고쳐잡은 큰딸이 던진순간 진짜로 윷이 나왔다.
이것이 바로 윷놀이의 마술인가? 아버님은 역시 윷은 쉬워. 윷은 쉬워를 반복하셨고,
그러자 딸은 윷을 두번이나 던지고 앞서 있던 우리 말을 잡기까지 했다.
이 기세를 이어가려는지 "하던대로만 하면 된다. 하던대로 모만 던지자(아직 던진 적 없음). 모!"를 외치시는 아버님.
사실 주문과 실제 결과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하지만 이기고 싶은 마음에 보통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오히려 마음 편히 좋은 결과를 기다리며 던지는 쪽이 잘 풀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딸은 계속해서 좋은 윷을 던지며 신나게 경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역으로 주문이 우리 팀까지 돌았는지 우리도 갑자기 윷이 잘 나왔고,
남편은 남은 말들을 열심히 계산해가며 최적의 위치에 배치했다.
사실 진정한 마법은 윷 던지기가 아니라 결과를 가지고 말을 쓰는 치밀한 전략이어서,
윷놀이는 마지막으로 개를 던진 우리 부부의 승리로 끝이났다.
이렇게 끝내기는 아쉬운지 남편과 아버님이 고스톱을 꺼냈다.
윷놀이의 기세를 이어서 고스톱까지 모두 이기겠다는 남편의 선언에 아버님이 답했다.
"장기와 바둑은 한 수만 앞서면 그 사람이 모든 게임을 이긴다."
적어도 고스톱에 있어서는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 유리하다는 자신감이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부자의 불꽃튀는 경기(두 사람끼리만의 불꽃)가 시작된다.
고스톱은 윷놀이보다 조금 더 전략이 필요한 게임이다.
득점 세트를 이해하고, 점수가 높은 세트에 집중하고,
전략적 카드배치, 상대방이 무슨 카드를 가졌을지 카드의 순서 외우기,
게임 흐름과 뽑는 카드에 따라 전략을 조정하는 유연함까지 가져야 한다...
라는 것이 이론이고.
타짜같은 영화를 보면 고스톱이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너가 패를 한장 더 가져갔네 덜 가져갔네
이거는 1장을 줘야되네 2장을 줘야되네 하면서 굉장히 째째하게 진행된다.
이것이 바로 복수의 고스톱인가?
이름은 고스톱이지만 점수가 날 때마다 고를 외치지 않고 모두 끊어버린 아버님 때문에,
승부는 내내 남편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래도 역시 한 수만 앞서면 계속 이길 수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남편은 진짜로 한경기도 못이겼다.
약간 더 높은 기술을 가진 플레이어가 판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윷놀이나 고스톱이나 운이 좌우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경험과 전략이 주요 승리 요인이었다.
공평하게 한 경기씩 이긴 우리는 드디어 놀이를 마무리했다.
저녁먹고 바로 시작했으니 약 5시간정도 플레이를 한 것 같은데,
중간중간 화장실 다녀오며 쉬기도 하고 음식도 꺼내먹고
나와 아이들은 나중에 구경만 하는 것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시간이 엄청 빠르게 흐르고 재미도 있었다.
명절마다 가족들과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때로는 방송이나 재미있는 영화를 같이 보기도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의외로 이렇게 소소한 게임을 하는 것이
많이 기억에 남는 것 같다.
틈틈이 쉬어가는 사소한 놀이로부터 재미난 것들을 깨닫고 배우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 조용하고 진지한 얘기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게임으로 분위기를 풀면서 전통과 새로움을
체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재미가 가족과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면서
또 다시 삶의 활력이 되어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