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다 독감접종 안내를 보게 되었다. 10월 중순부터 시작되어, 11월 초까지 맞는 것이 효율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세 명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병원에 데려가는 게 부담되었던 나는, 밑에 두 놈을 먼저 맞혀놓고 나랑 큰딸은 나중에 맞기로 했다. 그래서 일단 두 꼬마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분명 월요일부터 독감주사 시작이었는데, 좀 이른가 싶었던 수요일에 이미 병원은 독감주사 예방접종 인파로 꽉 들어찼다.
내가 야무지게 얼리버드인 줄 알았더니만, 이미 한국인들은 어린아이부터 학생, 회사원, 어르신들 할 것 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20명이 넘는 대기인원을 기다려 주사를 맞고 나니 새삼 한국인들이 참 부지런하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눈이 내리던 날이 기억났다.
밤 11시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이 새벽 5,6시쯤 되자 운동장에 가득 쌓였다. 단지 내 대형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사택동에 살고 있는 나는 6시쯤 화장실을 가다가 이를 보았다.
오케이, 얼마만의 눈이냐. 좋았어! 주말이었지만, 최대한 이른 시간에 움직일 작정이었다. 추우니까 잠시만 뒹굴거리다 9시쯤 나가자.
그렇게 8시쯤 애들을 깨우고 있는데, 이미 창 너머 바깥을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눈오리 메이커랑 썰매까지 들고 나온 가족들이 한가득이었다.
무려 주말아침 8시에! 9시면 거의 지각 수준이었던 것이다.
또 있다. 명절 때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우리는 내내 반대편에 막혀있는 자동차들을 보게 된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우리가 새벽같이 6시쯤 집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중간 휴게소에 7시 반쯤 도착하면 이미 인산인해이고,
그보다 더 늦은 8시부터는 아예 주차장처럼 차들이 길에 서 있다.
그렇다면 저 반대편에 서 있는 차들은 도대체 몇 시에 출발한 것인가?
8시인데도 길에 서 있다는 건, 적어도 앞 차들은 새벽 4시에는 출발했어야 그럭저럭 편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한국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부지런함과 근면 성실함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성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인들이 빠르고 열성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한국인들이 유독 부지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한국의 역사에서 농업이 삶의 기초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국의 역사는 농경사회로부터 현대 고도로 발전한 국가로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은 농업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가치를 형성했고,
한국인들이 부지런함과 끊임없는 노력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DNA에 새겼다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생존에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노동이, 현대 가치관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치열한 교육과 높은 경제성장 등 사회적 압력과 경쟁이 높은 편이다.
가족, 동료, 친구와의 비교와 경쟁은 일상에서 흔한 현상이며, 이는 한국인들이 성공을 추구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때로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구성원으로서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점차 개인주의가 되지만 아직까지는 통용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경쟁적인 환경에서 좋은 성과를 이루려면 부지런한 노력과 끈기가 필수적이다.
요즘 세간에는 갓생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갓(God·신)과 인생(人生)을 합한 신조어로, 하루하루 최대치로 열심히 사는 인생을 의미한다. 부지런과 성실의 가치가 아직까지 유효함을 보여준다.
워라밸의 역할이 중요해졌지만, 일을 덜한다고 해도 한국인들은 하다못해 노는 것도 부지런하다.
계획 꽉꽉 채워 여행을 가거나, sns로 트렌드를 섭렵하거나, 남는 시간엔 알바 자격증 인맥관리까지. 제각각 목표를 향해 바쁘게 달려가고 있다.
그렇게 갓생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져서 취업경력쌓기결혼육아노후까지.
완벽한 인생패턴을 위해 역설적으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마트폰에 눈을 꽂고 바쁜 걸음으로 종종 뛰어다닌다.
완벽한 인생과 행복이란 건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만들려는 욕망을 대변한다.
어딘지 안쓰러운 한편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아들의 학예회를 보러 갔다.
1시부터 1시 30분까지 입장이라, 조금 빠르게 움직이자 생각하고 정확히 1시에 도착했다.
선생님들의 안내를 받아 학예회가 열리는 강당으로 들어서자 가득 들어찬 인파에,
관람석 딱 2줄만이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1시 입장이면 12시부터는 줄을 서야지. 역시 한국인들은 참 부지런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같은 한국인으로서 나도 주섬주섬 몸을 움직여보지만,
아직 갈 길이 머니 더 분발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