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볼펜이 천개는 있을 것이다.
세 보지 않았지만 꽉 채워 들어가는 볼펜꽂이가 20개 정도 있는데,
볼펜꽂이 하나당 30개 정도 들어가니까 그것만해도 600개.
거기다가 딸이 서랍에 가지고 있는 볼펜들에 더해
방바닥에 굴러다니거나 집안 여기저기 손닿는 곳에 올려놓은 것들까지 셀 수가 없다.
그 중에서 애착볼펜이라 부를수 있는 건 5개 정도다.
부드럽게 써지고 그립감이 좋아 자꾸 집게 되는 것들이다.
평소 글은 컴퓨터로 쓰고 볼펜으로 작성하는 건 주로 가벼운 메모나 가정통신문 정도라,
한참을 썼는데도 아직 잉크가 많이 남아있다.
사실 잉크를 체크할만큼 사용한 것도 아니어서 얼마나 남았는지 자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아침 시간에 잠을 깰 겸 멍하니 에세이 몇 줄을 필사하고 있는데,
2줄 정도를 적었을 때 볼펜에서 잉크가 나오지 않았다.
뭐지? 하고 다시 죽죽 그어봐도 글씨는 안나오고 자국 뿐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당연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아 참. 볼펜을 다 쓸수가 있는 거구나?
이번엔 펜을 돌려서 다시 잉크를 확인했다.
이상하게도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뭔가를 열심히 사용하여 완전히 소진해버린 기분.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꽤나 오랜만의 감정이라,
단순한 마무리만으로 평온함이 느껴졌다.
인생에서 대부분의 것들은 진행상태와 끝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실은 작은 잉크통 하나를 다 쓰는 데에도 엄청난 품이 들어가는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일상속에서 치약을 끝까지 짠다던지 여행가기 전 냉장고를 모두 파먹는다던지하는,
작은 마무리가 새삼 큰 성취감을 느끼게 할 때가 있다.
작은 마무리는 내가 뭔가 완성해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어준다.
그 순간 내 인생에서 반만 사용하거나 미완성으로 남겨둔 것들이 떠올랐다.
시작은 했지만 끝까지 읽지 못한 책, 처음 몇 페이지만 채운 노트, 몇 년째 시작만 하는 영어공부.
그것들 모두 잉크가 아직 남아 있는 볼펜과 같아서 좋은 의도가 잊혀져 버렸다.
완성하려는 욕구는 여전하지만,
인생은 나를 너무 많은 방향으로 끌어당겨서 끝까지 한가지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진정한 가치는 얼마나 시작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끝까지 해내느냐에 있다.
책도 결심도 여기저기 흩어놓아봐야 한장이라도 펼쳐보는 편이 더 낫다.
한장이라도 더 펼쳐야 다른 페이지로 이어지며 결국 한 챕터의 끝이나마 도달하게 되니까.
그래. 한 권이 아니라 한 챕터의 끝이라도 도달해보는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것에 압도당하기 보다는,
작은 발걸음이나마 한걸음 내딛어야 진전이 있다.
인생은 항상 명확한 시작과 끝을 제공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여정을 음미하도록 만들어주는 건 이러한 작은 책갈피같은 순간들이다.
새해가 되고 나서 한달이 그냥 지나갔다. 그냥 논 것도 아닌데,
최대한 내가 가진 시간을 풀로 돌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취감이 약하다.
오늘이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이니 이것저것 도전해보자 싶지만,
하고 싶은 것들은 너무 많은 가운데 잠깐 도전하다 막히면 곧바로 동력을 잃어버린다.
비교적 선호하는 축에 속해서 한번씩 꺼냈다가 다시 던져버리는 볼펜이 있다.
내 인생에서 그 볼펜과 닮은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영어 공부"다.
나이 40에 또 시작이냐 싶으면서도 그래도 꼭 한번은 일정 레벨을 넘어보고 싶은 일.
놀면 뭐하니. 한장이라도 읽어보자.
뭐라도 시작하자는 마음에 최근 제일 쉬운 딸의 독해책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정규교육 12년을 거치고도 결국 잘하지 못하는 영어를,
아침마다 사전을 찾아가며 더듬더듬 읽어가는 내가 왠지 요령 없고 어설프게 느껴진다.
그래도 다시 쓰면 닳아가는 잉크처럼,
내 실력도 다시 닦아나가보고 싶다.
이제와 영어를 공부해봤자 뭐에 쓰나 싶지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그 작은 배움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가 조금씩 닳아가듯이, 보이지 않더라도 느리게 조금씩 숙련을 향해 다가간다.
속도가 빠르지 않더라도 조금씩 하다보면 어느새 끝에 다다르는 원리를 새기며,
당장 유창하게 되겠다는게 아니라 쉬운 책한권이라도 작은 챕터라도 끝까지 도달해보는 것.
그 작은 성공이 스스로에게 주는 뿌듯함이 계속해서 나아갈 힘이 되지 않을까.
작은 시도에서 얻는 기쁨은 가끔 터지는 보너스 같은 것이다.
영어로 예를 들자면, 처음엔 하나의 단어나 문장을 이해하는 것도 느리지만
점점 더 많은 문장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며 어느 순간 퍼즐조각을 맞추는 듯한 쾌감을 느낀다.
중요한 건 뭐가되었든 하나라도 붙잡고 해야 완성을 시도해볼 수 있다.
결국, 작은 것이라도 계속 배워야 그림에 맞는 퍼즐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으니까.
한번씩 생각날 때마다 꾸준히 쓰다보면 언젠가 끝에 다다르는 잉크처럼,
이쯤하면 원없이 에너지를 썼으니 아쉽지는 않다고 영어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올까?
나는 가끔 빠른 성과를 기대하며 시작하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시간을 채우는 것은 결국 하루하루의 작은 행동들이다.
처음에 가졌던 열정이 사라질 때도,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작은 걸음이라도 계속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은 많은 인생이지만,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나라도 해내는 법은 역시 하나씩 하나씩 시작하는 것뿐이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꿈은 아직 현실이 아니다.
볼펜 하나를 들어 그것으로 시작하자.
그리고 원하는 만큼의 잉크가 소진될 때까지 또 다른데로 눈 돌리지 말고 당분간 멈추지 말자.
꿈은 한 번의 시작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반드시 도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