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인가 고급 취미인가
어벤저스 영화를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 주인공들처럼 나에게도 한 가지 강력한 능력이 주어진다면? 물론 초능력이 좋겠지만, 초능력까지는 아니고 실제 인간이 가지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을까? 하다가 한국어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능력이라면 어떨까 싶었다.
이유인즉, 경험상 영어를 잘했을 경우 혜택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상점에 적용되는 대왕 할인카드 정도다. 기본적으로 모르는 외국인을 만났을 때 영어를 쓰면 대충 의사소통이 될 확률이 90프로다. 그래서인지 국가시험이나 대학 졸업 요건까지도 영어인증을 필요로 하는데 이럴 때 이미 영어를 잘한다면 프리패스 아니겠는가.
나는 고등학생 때 일본어를 전공하고 대학생 때는 서양어(유럽) 전공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을 투자했지만-어쩌면 다른 입시위주 공부한 친구들처럼-실력은 간단한 여행용 의사소통 정도다. 하지만 이걸 완벽히 못한다고 대단히 후회가 남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 두나라 다 가봤지만 영어로 말해도 다 알아듣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삼 영어는 더 필수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제2외국어가 쓸모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고 어차피 나 정도로만 활용할 거라면 그렇다는 것.)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공부는 안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했다. 사실은 평생 공부중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늘 수박만 겉핥는 기분이다. 의지가 있으면 노력이 따라붙어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 적어도 노력을 하면 어느 정도는 비례해서 실력이 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것도 작심삼일의 일종이라 진짜 오늘부턴 영어 공부해야지 다짐을 하고 2, 3주 정도 공부하고 나면 다시 안 하고 있다. 쉬었다 다시 하려면 앞에 공부한 건 이미 까먹었다. 근데 또 현생도 바쁜데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배우고 싶진 않다. 그러다 가끔씩 애들 영어책 읽어주며 절실하게 필요성을 느끼고 이젠 진짜 공부 좀 해야지 2주짜리 다짐을 하고 앉았다.
이렇게 쳇바퀴 굴리는 연례행사식 영어 공부를 하다가 현타가 온 건지 아님 진짜 지식 탐구의 철학이 떠오른 건지 이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 영어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이렇게 머리를 싸맬 정도로, 평생 애증의 영역으로 안고 갈 정도로 반드시 필요한 건인가? 아님 AI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가지고 내가 무슨 마스크 같은걸 쓰면 내 말을 바로 영어 번역해주는 기계가 나오는 게 아닐까?
그래서 찾아봤다. 한영 번역기와 통역기의 미래. 찾아보니 아주 가까운 미래에는 완벽한 기계가 나오긴 어려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영어 원서를 읽으려고 어설픈 번역기를 돌리던 대학시절부터 15년 정도가 지났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기계가 전문 번역가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번역 인력을 필요로 하는 거겠지? 같은 맥락으로 계산해보면 앞으로 10년 후 첫째 대학 입학까지도 완전 자동번역기의 등장까지는 짧은 시간이다. 컴퓨터가 모든 어순과 뉘앙스와 매년 트렌디하게 바뀌는 관용구까지 모두 학습한다 해도 인간의 언어라는 건 계속 변화하니까.
특히 통역기의 경우 더 어려운 기술이다. 일단 컴퓨터가 내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만 해도 내 말을 못 알아들어서 결국 갓길에 차를 세우고 키보드로 입력하게 만든다. 전자기기 음성인식 서비스도 그렇다. 며칠 전 남편이 메시아를 검색하려고 나름 발음을 굴려 메솨이아라고 입력했더니 기계가 몇 살이야로 알아듣고 제 나이는 비밀이랍니다라고 답한 적도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란 건 수직 상승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만하게 발전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몇 제곱을뛰어버리기도한다. 인류가 백만 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십 년 안에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완벽한 영어 통역 마스크 기계도 나올 수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야말로 준어벤저스급 능력이 기계 구매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영어공부는 필요 없는가? 일반인에게 수학 계산기 사용처럼 통역 번역기 사용이 편리한 보조가 된다면?
영어라는 과목도 더는 필수가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향유하는 기호재가 될 것이다. 이제 영어는 국어 수학과 다르게 춤이나 자수 같은 매혹적인 취미생활이 되나?
그래도 내 생각엔. 영어는 아직 공부해볼 만한 영역이다. 적어도 새로운 세상에 접근하고 이해하게 도와주는 유용한 아이템이니까 말이다.
나는 해외여행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물론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거지만, 기회가 생겨도 굉장히 부담을 느끼는 편이다. 그런데 티비에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외국 여행하는 프로를 보는 걸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영어가 완벽했다면 여행도 훨씬 좋아하지 않았을까? 자문하게 된다.
워낙에 겁이 많고 소심한 성격 탓에, 불안을 느끼는 지점도 낯선 타지에서 돌발상황이 생겼을 경우에 대한 두려움인 것 같다. 진짜 급할 때는 번역기 키기도 힘드니까. 바디랭귀지도 어느 정도껏이지, 중요한 서류를 소매치기당하거나 갑자기 알러지가 발생하면 주위에 어떻게 알릴 것인가. 이럴 때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면 나에게는 매력적인 무기이자 안정감을 주는 보호막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이든 사업이든 훨씬 선택지가 넓어지고, 부담 없이 세계를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지는 게 한 가지 능력뿐이라면 그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아직까진 영어는 너무 필수인 느낌이라, 내 능력은 좀 더 나만이 가진 시그니처였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영어는 여러모로 애증의 영역으로 영원히 함께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