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음악을 계속 듣는 편인가, 아니면 아껴두고 듣는 편인가?
나는 확 좋아해버리는 쪽이다.
한 곡에 반해버리면 질릴 때까지 돌려 듣는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듣기도 한다.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박히고, 멜로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면 그걸 끝까지 파고든다.
좋아하는 영화는 연속으로 세 번까지 본 적도 있다.
처음엔 내용에, 두 번째엔 연기에, 세 번째엔 배경과 미세한 대사에 집중하며 완전히 빠져든다.
좋아하는 책도 마찬가지다. 한 구절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 문장을 줄줄 외울 정도로 곱씹는다.
그렇게 좋아하면 마음이 꽉 차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그 순간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하지만 그렇게 전력으로 좋아하다 보면 감정이 금방 소모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확 타올랐던 불꽃이 순식간에 꺼지는 느낌.
마치 한 박자 늦게 도착한 내가, 벌써 떠나버린 감정의 자리를 바라보는 듯한 허전함이 있다.
그만큼 그 순간에 충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지만,
‘조금만 천천히 좋아했더라면, 더 오래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끔 고개를 든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그냥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확 빠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말투, 생각하는 방식, 웃는 얼굴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 내 안에 파고들어 어느새 커다란 호감이 된다.
표현을 자주 하거나 연락을 끊임없이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속으론 긍정의 감정이 가득하다.
괜히 좋아서 더 말을 아끼게 되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도 조심스러워진다.
오히려 너무 다가갔다가 실망하거나 멀어질까 봐, 한 발 물러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리에서, 좋은 인상만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괜히 더 조심하고 신중해진다.
이상하게도, 아주 좋아하는 만큼 더 어렵고 복잡해진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 글 하나에도 스스로 눈치를 보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너무 좋아서 괜히 더 서툴러지는 것이다.
반면, 처음에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계속 곁에 있는 것들이 있다.
처음엔 비슷해서 샀던 두 벌의 옷 중 하나는 올이 풀려서 대충 입으려 했는데,
이상하게 손이 더 간다. 편하고, 익숙하고, 아깝지 않아서.
나중엔 좋은 날에도 괜히 그 옷을 입는다. 나에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도 그렇다.
책장에 고이 모셔둔 새 책보다, 밑줄을 그어가며 아무렇게나 펼쳐 읽었던 책에 더 마음이 간다.
표지가 구겨졌고, 페이지마다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 흔적 덕분에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책을 읽던 내 모습까지 함께 기억나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렇다.
처음부터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 없이 편하고 스스럼없는 사람,
실수도 허용되고 말투도 편안한 사람이 결국 오래 남는다.
예의와 긴장이 빠지니, 관계가 덜 근사해 보일지 몰라도
그만큼 오래 가고, 오히려 더 깊어진다.
오래된 앞치마, 매일 쓰는 수건, 손에 익은 머그컵.
예쁘지도 않고, 새것도 아니고, 누군가 보기엔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내 손에 가장 잘 맞고, 내 일상에 가장 닿아 있는 것들이다.
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지만, 어느새 삶 한쪽을 꿰차고 앉은 것들.
그런 건 확 빠지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는다.
계속 곁에 있으니까 당연하게 여겼고, 그래서 더 오래 버티는 것이다.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그 마음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소중함이 더 깊어진다.
그래서 요즘은 생각한다.
확 좋아하는 감정은 찬란하지만, 천천히 좋아지는 마음은 단단하다고.
처음엔 덜 좋아해서, 그래서 더 오래도록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 마음은 오래 봐야 보이고, 오래 있어야 남는다.
불꽃처럼 환하게 타오르지는 않지만, 장작불처럼 은은하게 오래도록 남아 따뜻하게 데운다.
나는 여전히 어떤 것에는 쉽게 빠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금방 호감을 품는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 많이,
천천히 좋아지기 시작한 것들의 힘을 믿게 되었다.
그게 진짜 더 좋아하게 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덜 좋아해서 더 좋아하게 되는 마음.
요즘의 나는 그 마음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마음을 조금 더 자주 꺼내 쓰게 되었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막 좋아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아니까 마음이 편하다.
어떤 음식이든, 장소든, 사람 관계든 처음엔 그저 '나쁘지 않네'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다 어느새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 속에서 편안함이 생기면
자연스레 즐거워지고, 내 것이 된다.
예전보다 잔잔한 에세이나 일상 만화를 더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되었다.
한때는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나 강렬한 감정을 다루는 책들을 더 선호했지만,
이제는 그 속에서 느껴지는 작은 여운과 평범한 일상의 아름다움이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리 읽어도 특별히 인상 깊게 남지 않아서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그 조용한 흐름 속에서 점차 깊이가 느껴지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B급 감성인데 오히려 좋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매력적이고, 부족한 부분이 나를 더 끌어당긴다.
그 영화의 장면마다, 대사마다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매력을 더 부각시켜가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인공보다 감초 역할을 더 좋아한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아닌, 보조적인 역할이나 작은 인물이 때로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그다지 주목받지 않지만, 그들의 사소한 대사나 행동에서 더 큰 여운을 남긴다.
주인공이 만들어가는 큰 이야기 속에서 조용히 배경을 채우는 그 존재들이 나에게는 오히려 더 큰 매력을 발산한다.
그들의 미세한 감정선이나, 작은 행동들이 의외로 더 진지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주인공이 만들어내지 못한 감정의 빈자리를 그들이 채워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이런 경우도 있다.
한때 너무 좋았던 것들이
조금 덜 좋아지는 시간을 거치고 나면,
오히려 더 단단하고 깊은 애정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완벽하게만 보이던 것이 어느 날 허술해 보일 때,
전에는 보이지 않던 흠집이 눈에 들어올 때
오히려 더 편안해지고 애틋해지는 마음이 있다.
‘이제야 진짜 이걸 좋아할 준비가 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좋아하는 명소가 더 이상 멋지게만 느껴지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이 전부 다 좋게만 보이지 않아질 때,
그제야 비로소 애착이 생긴다.
그 낯설고 약간 불편한 시기를 조용히 지나야
좋아하는 것들이 나에게 내려앉는다.
더 좋아지기 위해서는, 감정이 옅어지는 순간을 조용히 지나갈 줄도 알아야 한다. 마음이 슬며시 거리를 두려 할 때, 그 거리에서 조금 더 머물러 보는 것. 그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그 사람도, 그 일도, 그 감정도 — 처음보다 덜 뜨겁지만 더 나다운 온도로 스며든다.
너무 좋은 것이 덜 좋아지도록 기다리는 건, 그 감정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시간이다. 처음엔 마음속에 떠오른 이상적인 이미지에 빠지기 쉽지만, 그 강렬한 감정을 조금만 뒤로 미루고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점차 그 대상의 진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상이 아니라 현실의 결을 느끼기 위해선, 약간의 거리와 시간이 필요하다.
대신 다른 관심사들에도 눈을 돌려 시간을 갖고, 감정의 온도를 천천히 조절하다 보면 마음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감정은 더 오래 머물고, 더 깊이 스며든다. 서둘러 좋아하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진짜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것이 나에겐 더 좋은 것을 더 오래 좋아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그 모든 시간이 쌓여
어쩌면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