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찾아왔다. 평범한 아침이지만 내게는 특별한 시간이다. 아이들의 여름 방학이 끝나고 두 달 만에 주어진 조용한 시간. 아이들을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등원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집은 더럽지만 고요하게 적막이 흐른다. 다시 두 달 전의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부터는 청소와 분리수거 빨래 등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장보기 가계부정리 공과금정리 밑반찬 만들기 등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냥 무심하게 하루 일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상부장 문을 연다.
아직 대충 먹은 아침 설거지도 하기 전이다. 잠깐 잊어버리고 상부장 안에 들어있던 컵들 중에 우리 딸리 즐겨 사용하는 시리얼 컵을 꺼낸다. 평범한 컵보다는 크고 그릇보다는 작은 사이즈다. 시리얼 컵에 양껏 얼음을 담는다. 당연히 그냥 컵보다 얼음이 많이 들어간다. 평소 먹던 디카페인 커피를 그 위에 따른다. 평소 같았으면 자리에 선 채로 벌컥벌컥 마시겠지만, 오늘은 좀 새롭게 집 안에서 그나마 깔끔한 식탁에 의자를 꺼내 앉았다.
한 모금 커피를 마셨다. 그 순간, 입 안 가득 커피 향이 피어올랐다. 씁쓸한 커피와 왠지 모를 자유의 달콤함이 입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두 달 동안 전쟁을 치르고 이제 막 10분 쉬기 시작했을 뿐인데 내 안에 미묘한 힐링의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이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조금이나마 변화해 본 아침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시리얼 컵에 담긴 커피 하나로, 일상이 좀 더 다채로워진 기분이었다.
항상 일 중독에 걸린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TV에 나오는 멋진 전문가 커리어우먼의 그것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의 머슴처럼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낮에는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는 너무 피로한데 잠이 오지 않을 때 술을 한 잔 기울이는 무한반복 라이프.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티도 안 나고, 5인 가구의 살림 더미 속에서 누구의 기준도 채우지 못한 채 허둥대다 하루가 흘러간다. 그래도 마냥 쉴 수는 없어서 30분 단위로 알람을 맞춰놓고 어슬렁어슬렁 마당 썰듯 일을 한다.
그러던 중 잠시 얻은 나만의 색다른 휴식 시간.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는 것도 돈이 아까워 집커피로 대체하지만 그래도 좋다. 물론 잠시 휴식한다고 해야 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큰 컵에 담긴 커피만큼 더 방대한 일이 밀려있다. 앉아있더라도 일단 세탁기랑 식기세척기는 돌리자. 모자에 묻은 잉크는 트리오를 발라놓고, 때 낀 신발은 과탄산소다.. 아가씨 때의 나는 완전히 p형 즉흥 인간이었는데, 이제는 내 몸이 쉬어도 머리가 알아서 돌아간다. 세척기만이라도 돌리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잠깐 한 모금만 더 마실까 하고 자리에 앉아 커피를 꿀꺽한다.
의미 중독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아침 루틴도 미라클 모닝 같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쉴 때는 의미 있는 재테크 공부나 자기 계발을 하는 게 좋겠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교육적이어야 하고, 식사는 건강해야 하며, 수면은 습관이 잘 잡혀있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컵에 내가 맘대로 제조한 커피를 마시는 일은 의미는 없어도 재미가 있다.
새로운 시도는 즐거운 경험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억지로 의식하지 않으면 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삶을 루틴 화하는 것은 생활을 간편하고 수월하게 만들어주지만, 그만큼 변화 없이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그런데 보통 새로운 시도란 것도 SNS 속 남들을 따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만큼은, 핸드폰을 켜는 대신 시리얼 컵에 그려진 고양이 모양을 손으로 따라 그리며 멍을 때려보기로 한다. SNS에 기록으로 남길 만큼의 의미는 없어도, 역시 재밌으니까.
평소의 나였다면 기분이 쳐진다 싶을 땐 유튜브를 보겠지만. 유튜브는 상호작용이라기보단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지치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것만 찾게 된다. 20분짜리 영상물을 보는 것도 힘들어서 1분짜리 쇼츠로 대신하곤 한다. 드륵드륵 마우스 볼을 굴리면서 화면을 내리다 보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어 지는데, 이런 삶에서 도파민 중독을 완화해 주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딸이 좋아하는 뉴진스의 음악을 틀었다. 삶이 지루할 때는 가창력 댄스곡으로 질러주는 게 좋고 과한 자극들에 지쳐있을 때는 이지리스닝으로 힐링이 필요하다. 슈퍼샤이 슈퍼샤이. 어느새 시리얼 컵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만큼 내 영혼에 채워진 에너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일을 시작해 볼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한다. 고양이 시리얼 컵이 춤을 추며 식기 세척기로 들어간다. 삶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런 일상이 있기 때문에 일탈도 재미가 있다. 새삼스런 일상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할 일이 가득한 나의 하루를 만끽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