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세스 윤 May 31. 2023

완벽한 정리정돈? 그냥 두세요. 필요하면 합니다.

안방과 아이방을 제외하고 방이 하나 더 있다. 서재 방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컴퓨터 방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옷방이라도 하기도 그렇지만 암튼 나머지 방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들이 모여 있다. 그냥 남편이 자주 들어가 있어서 아빠방이라 부르긴 하는데, 쓰임새도 그렇고 뭔가 특별한 공간이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책상 하나 덜렁 있는 데다가 컴퓨터를 올려놓고 가끔 책을 읽는 곳이었다. 이것저것 너저분하게 쌓아두긴 했는데 치워야지 치워야지 하면서도 손이 가질 않았다.



이삿짐센터에서 처음 배치해 준 그대로 그렇게 4년이 지났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나면 날을 잡고 치우리라. 생각은 했지만 나는 4년 내내 늘 지쳐 있었다. 남편도 계속 아쉬워만 할 뿐 자기가 먼저 치워보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단 물건을 끄집어내어 치우고, 책상과 책장과 수납장의 위치를 하나하나 바꾸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단단히 준비되는 그날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이대로는 또 4년이든 다음 이사 시즌이든 기약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중고 컴퓨터 한 대를 샀다. 아주 참신한 가격에 성능이 좋은 최신형이었다. 이 정도 가격에 이 물건을 샀으면 오히려 재테크라고 남편은 좋아했다. 물론 재테크가 될 만큼 빨리 팔지도 않을 거지만 이득을 본 것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논문도 읽고 회사일도 가끔 처리하기에 좋은 컴퓨터인데, 사실 게임을 빠르게 즐길 수 있다는 게 더 장점이었다. 컴퓨터로 유튜브나 영화를 보는 게 다인 내가 봐도 검색도 무지 빠르게 되고 꽤 쓸만하다고 느꼈다.



문제는 이 컴퓨터를 어디에 설치하느냐였다. 우리 집에서 이 컴퓨터를 설치할 공간은 남은 방 하나뿐이다. 3만 원대의 저렴이 책상에 너저분하게 쌓아둔 다른 물건들과 함께 올려두어야 했다. 그 공간 속에 컴퓨터를 넣어두면 그냥 한 뭉텅이의 창고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고, 내가 책상을 살짝 치워주겠다고 하자 남편은 이 귀한 몸을 그렇게 방치할 순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4년 만에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마음도 체력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냥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인테리어에는 전혀 재주가 없는 내가 배치를 생각해 냈다. 책장을 한쪽으로 몰고 책상을 벽에 붙여서 방을 피시방처럼 만들자. 언젠가 인테리어 솔루션 방송을 보면서 저렇게 한 번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성 평균키보다 큰 책장 두 개와 무거운 짐들을 모두 옮겨야 한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대충 살자라고 했을 남편도, 갑자기 이삿짐센터에서 파견된 직원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책장 아래에 작은 매트를 깔아 소리가 나지 않도록 부드럽게 옮기고, 수납장에 든 물건들은 빼서 위치를 옮기고 다시 정리한다. 그 와중에 버릴 물건들과 정리할 물건들도 완벽히 분리해 냈다. 책상 위에는 신형 컴퓨터와 스피커가 자리를 잡았고, 온갖 잡동사니들로 정신이 없던 방 내부가 진짜 아늑한 사무실에 온 것처럼 말끔해졌다. 마치 몇 배속으로 우리의 움직임을 촬영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들이 자리를 잡았다.



4년 동안 방치 되어있던 공간이 완벽히 정리되는 데 걸린 시간? 버릴 물건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시간까지 모두 합쳐서 정확히 세 시간이었다. 세 시간이면 집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삿짐센터 분들이 모든 짐을 옮기는데 반나절이 걸리니까, 우리가 방 하나를 열심히 정리하는 데 세 시간이면 된다는 것도 말이 된다. 세 시간이면 될 일을 지금껏 마음의 준비 운운하고 있었다니?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까지는 전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우리 집에 컴퓨터가 새로 오지 않았다면 그 이후로도 안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컴퓨터가 왔을 때 그냥 책상만 조금 치워 올려놓자 했더라도, 아마 비슷하게 한 시간 정도는 걸렸을 것 같다. 이전과 다르게 말끔하고 정돈된 방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은, 사람이 필요하면 다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나는 필요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필요하다고 의식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살아왔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마음을 먹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몇 년씩 묵은 일을 몇 시간 안에 제대로 해결할 수도 있다.



내가 그때까지 그 방을 전혀 치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가끔씩 책이랑 잡동사니를 갖다 버리고 청소기로 열심히 밀었다. 그런데 늘 정리 안된 창고처럼 어수선했고, 마음이 불편했다. 늘 더러웠던 방은 게을러서기도 하지만 아무 이상향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였던 것 아닐까. 더럽다고 억지로 조금씩 치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할 필요는 없다. 해야지 해야지 미뤄가며 마음만 불편할 뿐이다. 그보다 우선적으로 나는 내 거주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싶은가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



목표를 잘 세우고 첫걸음을 내딛는다면, 해결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후로는 일단 시작을 하자.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일단 마음을 먹고 조금씩 하다 보면 길이 생긴다. 가야 할 목표가 분명하다면 방법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순서, 계획이 없더라도 닥치는 대로 의식의 흐름을 따라 해치우다 보면 알아서 형식을 잡아간다. 단순히 청소하자가 아니라, 나는 내 방을 아늑한 사무실처럼 꾸미고 싶어.라는 방향성만 생기면 된다. 마인드맵에 그려진 청사진대로 얼추 방향과 모습을 잡아가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할 필요는 없다. 내가 진짜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언젠가는 다 하게 되어있으니까. 스스로 자책하지도 말자. 내 무의식이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끔씩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자. 굳이 불편한 마음으로 깨작깨작 어설프게 처리하지 말고, 최종방안만 생각해 두자. 거기까지만 해두고 일정 부분은 마음을 내려놓고 있자.



그러다 새로운 컴퓨터와 같은 영감 한 방울이 톡 떨어져 의지가 충만해지는 순간 미래의 내가 해결해 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둥맘이 화날 때  마음 다스리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