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만 버릴까 했는데요

비우는 것부터 시작이다

by 따스한 Ms 윤

어느새 코 앞을 다가온 신학기.

애꿎은 달력만 멍하니 쳐다본다.

허송세월 보내기에는 아까운 신년의 2월이지만,

시작을 고민하는 자리에서 변화 없이 한참을 맴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하자니 불안한데 어쩌지?


3월에는 큰 변화가 있다.

집에서 2명이나 새로운 학교로 입학하고,

새롭게 시작할 일도 많다.

그 변화를 기다리며 뭔가 준비는 해야겠는데,

의지는 희미하고 조급함만 또렷하다.


멍하니 시선을 옮겨 집 안을 둘러보는데,

딱히 더러운 건 아니지만 어딘지 답답하다.

이사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화수분처럼 솟아난 짐들.

부지런히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산만하다니?

실제인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여백이 아쉬워 진다.



새출발이 코 앞인데 이러고 있다


유난히 낡은 훌라우프 하나가 눈에 걸렸다.

지압형으로 크고 무거운데 매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니,

저거 하나만 치워도 마음이 한결 개운해질 거 같았다.

본능적으로 훌라우프를 집어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현관을 향하다,

이거 하나만 달랑 버리기에는 외출하기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딸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같이 버릴 거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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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별 뜻은 없었다. 이왕 나가는 김에 한두 개 더 얹으면 좋겠다는, 그 정도의 소박한 계산이었다.

그런데 딸이 “어디 보자…” 하며 책장 앞에 서더니, 한 권을 빼고, 또 한 권을 쌓고, 정리함을 슬쩍 당겨본다.

그 손놀림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그제야 눈치를 챘다. 아차. 이거, 훌라우프 하나로 끝날 분위기가 아니다.

괜히 건드렸다 싶은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최애 가수가 생긴 딸에게 씨디를 몇 장 사줬는데,

정리를 마음 먹은 김에 아예 취미 칸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며 책장을 통째로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이건 버리기 몇 개의 문제가 아니라, 구획을 새로 짜는 작업이었다.

필요 없는 것들은 과감히 빼고, 애매한 것들은 미련 없이 내려놓는다.

자기 세계를 위해 착착 자리를 비워내는 느낌이었다.


"책은 좀 빼야겠네.."

나도 가만히 있기가 뭐해서 훌라우프를 잠시 내려놓고 안보는 학습만화를 뒤적인다.


정리라는 건 생각보다 동적인 행동이다.

일단 꺼내야 하고, 펼쳐야 하고,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별해야 한다.

몸이 움직여야 한다.


그 움직임에는 소란이 따른다.

먼지가 날리고, 바닥이 더 어질러지고,

마음까지 덩달아 뒤집힌다.

잠시 전보다 더 엉망이 된 풍경을 마주하면

괜히 평화를 깨뜨린 사람처럼 서 있게 된다.



그냥 둘 것을 그랬나?


"저건 또 뭐지."


책장 위에 올려둔 상자에 뭐가 있는지 보려고 손을 뻗었다.

그 때였다.

생각보다 엄청난 무게의 짐이 쏟아지며 어깨 위에 부딪혔다.


쿵.

순간 화끈 거리며 머리로 열이 올랐다.

욱신거리는 감각에 짜증이 치민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크게 정리할 마음도 없었는데 왜 일이 커졌담?

그냥 냅둬도 될 것을 괜히 정리를 시작했나?

공연히 딸한테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러게 평소부터 했음되지.. 지금 공부하기 싫어서 괜히 물건 뒤엎는거 아니여?


"에휴, 아니지."


말을 뱉으면서도 안다.

그건 괜히 일을 벌여버린 나 자신에게 한 투정이라는 걸.

이런 작은 일에도 예민해질 만큼

조금의 여유도 없는 자신에 대한 짜증이다.

뭐 하나 비우기도 쉽지 않다. 뭐하나 비우는 것도 힘들만큼 항상 지쳐 있다.


조금만 건드려도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상태.

하나를 치우려다 다른 것까지 다 무너질까 봐

애초에 엄두를 내지 않는 마음.


"파스 붙일까?"


딸에게 부탁해 양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잠시 열기를 식힌다.

제대로 부딪힌 건지 파스를 붙인 자리가 쫙쫙 빨아들이듯 시원하게 풀려간다.

화가 식으니 묘하게 진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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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쌓인 짐더미를 보며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도 똑같은 더미가 존재한다는 걸.

남길 것. 보류할 것. 그리고 버릴 것.


오히려 분노가 원동력이 된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장판처럼 보이기만 하던 짐들이 와르르 쏟아진 게 아니라 드러난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안 쓰는 봉지 하나를 들고서,

지금의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을 주섬주섬 담아나간다.


첨가하기보다 덜어내기가 더 어렵다.

늘 쌓아오면서 비워내는 연습은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비우고 줄여야 중요한 것이 드러난다.

그래야 비로소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할지도 선명해진다.

예컨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취미 칸 같은 것들.



쌓아두면 흐릿해지고,

비우면 나타난다.


그 날 우리는 꽤나 많은 짐들을 내다 버렸다.

그리고 아마도,

보이지 않던 마음의 군더더기 몇 개도 함께 내려놓았다.


딸은 마음에 들었는지 뿌듯한 표정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디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알고 내 공간이 정돈되었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크다.

내 공간이 정돈되어 있다는 개운함.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다는 안도감.


덤으로 잃어버렸던 물건들도 엄청 찾았다.

없어진 줄 알았던 시계, 한참 찾던 가방, 잊고 있던 작은 소품들까지.


3월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채울지만 생각했었다.

새 다이어리, 새 계획, 새 목표.

하지만 그 전에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들어올 것이 새롭게 숨 쉴 공간을.


시작은 손에 쥔 것 하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새로 들이는 대신 하나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

그래야 내일이 들어올 자리가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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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제미나이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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