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대부분 물경력이지만

by 따스한 Ms 윤

돌아보니 인생의 대부분을 물경력으로 살았다.

좋은 회사를 다녀본 것도 아니고, 변변한 커리어도 없다.

결혼 후 현재는 직장도 없이 아이들 육아만 십여년 째다.

가진거라고는 이미 오래된 학벌과 틈틈이 딴 자격증 정도인데,

며칠 전 TV를 보니 이제 곧 AI가 그 정도는 쉽게 대체할 거란다.


전화 교환원이 사라졌듯, 타이피스트가 사라졌듯

내가 지금까지 전문 경력이라 여겼던 것조차 빠르게 교체될 수 있다.



어떤 경력이 살아남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사람의 능력이란 걸 뭘로 판단하게 될까?


따로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여전히

학벌이든 자격증, 회사 커리어, 자산이든 능력을 수치화한 게 필요할 것이다.


새로운 지표는 없을까?

누군가는 팔로워수 같은 네트워크 영향력이 강해질 거라고도 하지만,

변수가 많이 섞이는 느낌이라 좀 더 본질적인 것에 대한 어떤 요구가 있지 않을까?

상황에 따라 나락으로 가버리지 않는 정해진 능력의 증거.

그런 게 있다면 더 이상 직접 증명할 필요도 없을텐데 말이다.



능력은 게임에서처럼 점수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여전히 학벌을 붙잡고, 자격증을 모으고,

이력서에 쓸 수 있는 한 줄을 애써 만들어낸다.


그것이 완벽한 능력의 증명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적어도 한 번은 통과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 아래에서, 어떤 경쟁 속에서

‘이 정도는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는 기록 말이다.


생각해보면 사회는 언제나 사람의 능력을 직접 보지 못했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고,

성실함의 총량을 정확히 잴 수도 없다.


그래서 사회는 늘 간접적인 증거들을 모아 사람을 판단해 왔다.

학교 이름, 회사 이름, 자격증, 시험 점수,

심지어는 사는 동네와 자산까지도

모두 그 사람을 설명하기 위한 숫자와 기호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능력을 측정하는 사회에 사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추측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ChatGPT Image 2026년 3월 10일 오전 12_45_52.png 출처 - 챗지피티로 그린 퇴근길



물경력과 찐경력의 경계선


그렇다면 더더욱 묘한 일이 생긴다.


어떤 능력이 중요해질지 우리는 알 수 없고,

어떤 경력이 미래까지 살아남을지도 알 수 없다.


지금 대단해 보이는 일들이

십 년 뒤에도 의미 있는 경력으로 남아 있을지,

아니면 전화 교환원처럼

어느 날 조용히 사라져버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역으로 이런 질문을 해본다.

전문성이 없으면 생산적이지 않은 것인가?



izabelly-marques-5Kc5o7Cfikk-unsplash.jpg 출처 - Unsplash의 izabelly-marques



중요한 것은

어떤 대단한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일 수도 있다.


아주 대단한 커리어가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크게 인정받는 일이 아니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그저 살아가며 이어가는 일


얼마 전, 살아있기만 하면 적어도 손해는 아니라는 법륜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우울함에 빠져 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아이 엄마에게,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세상이 사라진다는 건 큰 상실이고 손해라고 하신 말씀이다.

엄마가 돈을 벌어오고 밥을 차려서가 아니라,

묵묵히 조용히 살아가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대단한 경력 대신

그저 하루하루의 일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삶은 평범한 시간들의 축적이다.

그리고 그 일들은 이력서에 쓰기에는 너무 사소하고

사회가 평가하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하지만 미래라는 것은 늘 이상하게 흘러가서

그 평범한 시간들이

언젠가 뜻밖의 쓸모를 갖게 되기도 한다.


경력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위대한 서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일을 하며 보낸 시간들이

나중에야 하나의 이야기로 묶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jay-antol-Xbf_4e7YDII-unsplash.jpg 출처 - Unsplash의 jay-antol



그래서 나는 요즘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물경력이란

아직 어디에 쓰일지 모르는 시간들일 수도 있다고.


어떤 일이냐가 아니라 일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업적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작고 사소한 일들도

언젠가 어디엔가 닿을 가능성을

조용히 품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변변찮은 오늘이 아니라,


그 변변찮음을 탓하며 흘려보내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배경 출처 - Unsplash의 jamie-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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