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대하여

이 땅의 청춘들을 위하여

by 바람

오늘은 술에 기대 하루가 저문다.


친정 가족들은 모두 술을 즐긴다. 명절에 술자리는 당연했다. 1년에 8번에서 시작해서 결혼하기 직전 4번으로 줄어든 제사에서도 술이 메인이었다. 부모님의 생신, 큰오빠 생일, 조카들의 백일과 돌잔치에도 항상 술이 있었다. 모두가 빠짐없이 참석했고 술자리를 즐겼다. 술자리를 위해 참석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지금은 아버지 기일, 어머니 기일이 모이는 날이다. 모임이 적어 서운하면 대하 철이나 꽃게 철에 모이고 오디술이 잘 익었다고 모인다. 김장을 마쳤다고 모이기도 한다. 이쯤 되면 올케의 너그러움을 칭찬해야 할 듯하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가족들의 술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 형제마다 평균 네 명의 가족이다. 집 안은 바글바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술에 취해 종으로 횡으로 불규칙하게 누울 때면 나의 규칙적인 일상은 뒤집어졌다. 술에 취한 장정들이 서넛, 살뜰히 챙겨야 하는 조카들도 서넛. 멀쩡한 정신에 감당하기 힘들었다. 술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나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중 멀쩡한 이들에게 직접 내뱉기도 했었다. 작작 마시라고.


직장을 다니며 술을 접한 것은 이십대 중반. 종로 2가의 뒷골목, 노가리 안주의 호프집이거나 돼지갈비 집이었다.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다. 노리끼리한 색의 비릿한, 냄새만으로도 구역질 나오는 그 첫맛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엔 한 모금 다음엔 두 모금 비위 상하는 속을 달래며 홀짝 홀짝 마셨다. 술에 취한건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이미 취한 친구들에 취한 건지 모를 때까지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술집을 둥둥 떠다니는 알코올에 젖어드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까지 질기게 앉아 술을, 술집의 분위기를 즐겼다.


교직에 있을 때, 점잖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은 말들을 즐겼다. ‘월요일은 원래, 화요일은 화끈하게, 수요일은 수시로, 목요일은 목숨 걸고, 금요일은 금방 마시고 또 마시고, 일요일은 일찍부터’ 마시자는 구호를 회식이 정해지는 요일에 맞게 외쳤다. 모두가 안면의 근육을 활짝 펴고 학교를 나섰다. 매번 다가오는 금요일이 늘 불타는 금요일은 아니었으나 불타는 뜨거움으로 그날의 아침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말을 맞이하는 구호로 ‘불금!’을 외치며 퇴근했다. 뜨거운 밤을 맞이할 것처럼.


결혼 이후, 친정에서의 술자리는 합법적 외박의 수단이었다. 유일하게 면허 있는 남편이 술에 취하면 친정에서의 하룻밤이 허락되는 것이다. 주정을 감당할 만한 내공은 이미 쌓였다. 달콤한 외박을 즐기면 그뿐이다. 밥을 안 해도 되고, 적당히 거들기만 해도 괜찮은 시누이가 됐다. 여기에 두둑한 지갑만 준비되면 조카들까지 배려하는 훌륭하고 인간적인 이모, 고모로서도 완벽했다. 친정이 그리워서, 엄마가 보고 싶어 찾는 술자리에서 주당으로 거듭나기까지 했다. 인생은 쓴 소주도 달게 만드는 마법의 세계다. 텁텁하면 텁텁한 대로, 독하면 독한 대로 온갖 술들이 차례차례 달달해졌다. 장족의 발전이다.


나이가 드니 숙면을 위해 술을 찾는다. 그렇게 1년을 유지하니 고개를 숙이면 배가 둥실 떠오른다. 처음엔 가족을 이야기한다. 사회를 넘어 국가를 논하며 서로 자신의 말이 무엇이었는지 모를 때까지 마신다. 그렇게 다정하게 시작하고 마무리 없이 끝이 난다. 제풀에 쓰러진다. 숙취로 인해 다음 날 절반은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기분이다. 하루가 반토막이다. 술을 끊기로 했다. 술을 끊으니 얘기가 사라졌다. 조용한 저녁이다. 일찍 하루를 마감하고 또 일찍 잠자리에 든다. 밤새 서너 번의 뒤척임은 당연하다. 자다가 깨면 다시 잠들기 어렵다.


숙면을 위해 대책이 필요했다. 이른 저녁식사 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술자리 시작처럼 다정하게. 동네 한 바퀴 답사가 필수 코스다. 집을 나서 작은 공원을 지난다. 옆 초등학교를 지나 유흥가로 나온다. 직장인들이 늦게까지 즐기는 유흥의 거리를 세세히 살핀다. 양쪽으로 뻗은 먹자골목을 기역자로 훑는다. 어느 집이 잘 되고 어느 집은 안 되고. 어떤 이는 덜 마셨고 어떤 이는 그만 마셔야 하고. 음식점의 종류도 꼼꼼히 지적한다. 전통음식보다는 온갖 종류의 퓨전이 우리의 음식문화가 되었다고 논평을 덧붙인다. 깊이 잠드는 밤을 위한 기분 좋은 고단함을 즐긴다.


가을비가 내린다. 아직 오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우산을 준비해 나선다. 문자를 주고 받아 우산을 전달하고 너무 늦지 말라고 당부한다. 돌아오며 마트에서 술 한 병 산다. 김사인은 닿을 수 없는 옛 생각에 소주를 핥았다고 한다. 신경숙은 부엌에 쪼그려 쪼르르 마셨다고 하고 현진건은 사회가 술을 권해 마셨다고 한다. 오늘은 우리 부부에게도 이놈의 사회가 술을 권한다. 쓴 소주를 핥기도 하고 쪼르르 따라서 마셔보기도 한다. 사회가 권하는 술에 흔쾌히 응한다. 우리 집 청춘은 공시를 위해 오늘도 분투중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