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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r 30. 2020

함께 한 시간들

[영화 리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요즘에는 갈 수 없지만 마음 먹고 외출을 하게 되면 코스에 미술관 한 곳은 꼭 넣는다. 관람을 해도 좋고 밖에서만 미술관을 둘러봐도 좋다. 세상은 어디든 사각의 프레임을 얹으면 사진이 되고 그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에 나름의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에 관한 책을 서너 권, 여성 화가를 다룬 책을 두어 권 재미있게 읽었을 뿐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가 아는 유명한 미술가의 이름들 가운데 여성의 이름이 극히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미술사의 시대도 여성에게는 가혹했다는 생각과 함께,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작은 아씨들>의 넷째 에이미의 모습도 영화를 보는 순간 떠올랐다.


<작은 아씨들>의 에이미는 그녀의 뒤를 후원해 주는 대고모라는 존재가 등장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마리안느에게 후견인에 관한 얘기는 없다. 그녀는 화구가 바다에 빠지면 스스로 바닷물로 뛰어들어 건져내고 젖은 몸에 화구와 짐을 둘러메고 화가로서 자신을 선택해 준 집으로 씩씩하게 찾아간다. 강단이 있다. 영화는 자연과 등장인물만 남고 주변의 상황들을 모두 배제했기 때문에, 대상화된 여성이 아닌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는 여성이 보인다.


영화 <작은 아씨들>에도 여성들이 다수 등장하고 여성이 주도적으로 영화의 흐름을 이끌어가지만, 이 영화처럼 오롯이 여성의, 여성에 의한(감독과 주요 출연배우 전부가 여성), 여성들끼리의 미묘하고 세밀한 감정을 그린 작품과는 결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아씨들>에서의 조와 에이미는 남편을 각자의 기준에 따라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세 명의 젊은 여성들에게 남성이나 남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랑)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초상화는 신부보다 먼저 시댁에 보내지는 것이다. 엘로이즈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때문에 마리엔느는 엘로이즈가 알 수 없게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마리엔느는 엘로이즈의 얼굴선, 손, 목, 머릿결, 입은 옷의 결 등의 느낌들을 포착하고 초상화를 차근차근 완성한다. 그녀를 은밀히 관찰하고 그리며 마리안느는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기류에 휩싸이게 된다.


몰래 그린 초상화지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초상화를 보여준다. 속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다.

"나예요? 당신이 본 내가 이랬나요?"
"그림에는 규칙과 관습, 이념이 있어요."
"다른 건 없나요? 생명력은 없나요? 존재감도?"
"존재감이란 그저 진실되지 않은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어떤 감정들은 아주 깊어요. 나랑 이 초상화는 닮지 않았어요."


자신과 닮지 않았다는 엘로이즈의 말에 마리안느는 결국 초상화를 찢는다. 다시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하고 엘로이즈도 적극적으로 모델로서 포즈를 취한다.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며 둘은 마음도 서로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초상화를 완성하며 엘로이즈와 마리엔느는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게 된다.


"분노가 보여요, 동요할 때 손동작을 보면.
 당황스러울 때는 입술을 깨물죠.
 화가 날 때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요."
"할 말이 생각 안 나면 당신은 이마를 만져요.
 평정심을 잃으면 눈썹이 올라가죠.
 당황할 때는 입으로 숨을 쉬고요."


사랑하는 연인의 대화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고립된 섬, 닷새 간의 기간, 제한된 인물들은 두 사람이 사랑에 깊이 빠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더욱 극적이다.



계급이 존재했던 시대에 귀족과 고용된 화가, 그리고 하인 소피(루아나 바야미)는 친밀한 우정을 나눈다. 이들은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 생활한다. 소피의 원치 않는 임신과 그 아이를 낙태하기 위해 방법을 짜 내는 것, 최선을 다해 돕고, 위험한 상항에도 함께하는 모습을 통해 세 사람이 만든 완벽한 세상을 보여 준다.


마리안느가 가져온 책을 엘로이즈는 소피에게 읽어 준다. 오르페우스 신화 이야기를 통해 셋은 사랑과 운명과 인간의 미묘한 감정을 얘기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마리엔느의 그림이 화랑에 전시되고, 그 그림에 대한 해석을 '오르페우스 신화'로 해석하는 장면을 통해, 마리엔느와 엘로이즈의 이별을 비극으로 해석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책을 가지고 토론할 때의 세 사람의 달랐던 생각만큼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감정들을 말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음악 또한 인상적이다. 좀체 마음을 열지 않고 살아가는 엘로이즈에게 음악의 새계의 문을 열어준 곡은 비발디의 <사계>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마리엔느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엘로이즈를 음악의 세계로 안내한다. 엘로이즈가 음악을 만나는 순간 느끼는 감정은 관객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사계>는 영화 후반, 음악회에서 엘로이즈의 격정적인 감상의 장면으로 이어지고 그 모습을 마리엔느는 지켜보고 있다. 멀리 떨어진 채 만나는 둘의 재회의 순간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음악으로 각인되게 만든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음악이기를 원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본 뒤에도 또다시 그 음악을 들으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길 바랐다."(셀린 샴마 감독)


영화가 끝나고 나서 비발디의 <사계>를 다시 들어 보았다. 감독의 의도는 완벽한 성공이다.


우리가 <기생충>에 열광하던 당시, 이 영화는 <기생충>과 함께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함께 올랐고, 이밖에도 다양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며 작품성을 입증한 영화다.


작품성이 감상의 포인트가 될 수는 없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묘한 여운이 남는다. 아름답고 따뜻한 실내와 대 자연이 배경이 되고, 계급 사회의 여성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여성들의 넘치는 '쿨'함도 영화에서는 보여 주는 것 같아 영화의 뒷맛은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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