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Mar 20. 2021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와 이건희 컬렉션

박물관에 가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그렇지만 가벼운 산책의 느낌은 아니다. 예술을 잘 몰라도, 박물관에 가면 역사의 유구한 흐름과 인간의 삶을 생각하는 배움의 열정을 끌어올리게 된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다시 보아도 새롭게 보아지는 것이 늘 신기하다.


며칠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용산으로 옮기고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처음 가는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상설 전시는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설을 공짜로 본다는 것이 매번 황송했다. 드문드문 가족과 함께 찾은 사람들이 있었고 넓은 시설은 대체로 한가로웠다. 관람실을 돌며 오래 서서 유물과 마주했고 마음껏 그 시간을 즐겼던 것 같다.


기증으로 보게 된 김정희의 '세한도'


매표소로 향하니 마침 특별한 것을 전시하고 있었다. 김정희의 <세한도>였다. 공짜도 좋지만 돈을 내고라도 이런 특별한 전시는 꼭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매번 소식과 서적을 전해 준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린 것이다. 제자의 한결같은 마음을 추운 겨울에도 변함이 없는 소나무와 측백나무에 비유하여 <세한도>를 제작한 이유를 소나무 그림 한쪽에 적은 작품이었다.


특별 전시되고 있는 국보 제180호 <세한도>는 19세기 후반 이상적의 제자인 역관 김병선에게 전해졌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김준학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김준학은 <세한도> 앞쪽에 제목과 시를 쓰고, 뒤쪽에 청나라 문인들의 감상 글 사이에 자신의 시를 적어 넣어 자신이 <세한도>의 소장자임을 드러냈다. 이후 <세한도>는 개성 출신 사업가 손세기 선생과 장남 손창근 선생이 소장하게 되었고,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전시실 입구에는 <세한도>에 담긴 김정희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장 줄리앙 푸스 감독의 <세한의 시간>이라는 영상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신비롭고 쓸쓸한 느낌의 영상이 끝나고 다음 전시실에 세한도 두루마리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에, 청나라 문인 16인과 우리나라 문인 4인의 감상을 적은 것이 한 두루마리에 나란히 담겨 있었다. 관람객들을 위해서 문인들 각각의 글에 대한 상세한 해설도 덧붙여 당시 <세한도>를 마주했던 이들의 특별한 감상을 함께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문인들의 감상은 김정희의 글과 그림 곳곳에 드러나는 추사의 깊은 내면과 시대적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감상을 적은 각각의 필체가 주는 감동도 있었다. 굵고 가늘고, 각진 듯 반듯하고 흐르는 듯한 필체들은 자체로 예술작품이었다. 거기에 문인들의 인장까지 더해져서 거대한 <세한도> 두루마리가 완성된 것이었다.  


길게 이어진 세한도의 두루마리 전체를 감상하고 나니, <세한도>는 작품이 만들어진 1844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감상이 더해지며 작품이 재창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은 새로운 생명력을 더하고, 관람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고스란히 향유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과 이건희 컬렉션


<세한도>를 감상하고 박물관 상설 전시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곳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기증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기증자의 이름을 딴 전시실과는 별도로 '기증문화재실'도 있었다. 전시품은 토기를 비롯하여 청동기, 도자기류, 목가구류, 금속공예류, 문방구류, 회화류 등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다양한 분야의 많은 작품들이 기증자의 이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져온 것이거나 자신들의 돈으로 수집한 것이겠지만 큰 가치가 있는 국가적 유물을 국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선뜻 내놓았다는 것이, 감상하는 내내 묘한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최근, 미술품이나 유물 등으로 세금을 대납하는 물납제도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면서 10조 원 대로 추정되는 상속세의 대물 납부에 대한 것이 논의의 시작인 듯하다. 우리나라 상속법에 의하면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납부하는 대물변제 물납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국회에서 물납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발의되었다고도 한다.


이건희 회장 컬렉션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들이 파블로 피카소, 클로드 모네, 마르크 샤갈, 오귀스트 로댕, 프랜시스 베이컨, 앤디 워홀 등 대작들이다. 수백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 근현대 미술품은 작가의 명성만으로도 화려하다. 거기에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 반가상' 등 국보와 보물 100여 점, 한국 근현대미술 2200여 점도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니 그야말로 명품들의 향연이다.


우리나라의 '상속세법 및 증여세법' 2장 4절에는 '공익목적 출연재산의 과세가액 불산입' 조항이 있다. 제17조(공익신탁재산에 대한 상속세 과세가액 불산입) 항목에는 "상속재산 중 피상속인이나 상속인이 종교ㆍ자선ㆍ학술 또는 그 밖의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신탁을 통하여 공익법인 등에 출연하는 재산의 가액은 상속세 과세가액에 산입 하지 아니한다(개정 2011. 7. 25., 2014. 3. 18.)고 돼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삼성이 상속받은 문화재 예술품을 재단에 출연하면 이에 대한 상속세를 한 푼도 안 낼 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 재단에서 이건희 컬렉션을 영구적으로 관리하며 작품의 외부 유출을 막고 미술관 전시 등을 통해 공익사업을 계속할 수도 있다고 한다.


10조 원의 상속세와 우리의 국보와 보물이 공공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것, 그 둘을 경제적 가치로 비교하거나 따질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상속세의 물납에 대한 여론의 배경과 엄청난 국보급 소장품을 가진 상속세 납부 당사자들의 의도는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선조들의 유산이 물질적 가치로만 매몰되지 않았으면


지난 11일 한 시민단체는 YTN과의 인터뷰에서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문화재와 미술품 물납은 조세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어, 물납 논의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있기도 하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한편에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유물을 기증했고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그렇게 <세한도>가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고,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이래 2016년까지 70년간 2만 8천여 점의 문화재가 돌아왔다(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부과된 세금의 절세 또는 현금 납부의 부담을 덜기 위해 물납을 얘기하고 문화재를 거론한다.


지난 1월, '아트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많은 국가들이 일반 국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공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이런 중요한 문화재와 미술품을 끌어내 '문화유산'으로 환원시키는 데 조세제도를 활용하고 있다"라며 "물납제는 우리가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등 보편적 문화복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고도 말한다.   


예술품을 돈으로 취급하는 사람들, 투기와 비자금을 조성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알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세금의 물납이 허용되더라도 우리나라의 국보가, 선조들의 유산이 물질적 가치로만 매몰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나라의 국보급 문화재가, 교과서에서만 봤던 그 작품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의 수장고 안에서 가치가 더 오르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소유가 누구에게 있건 우리나라의 유산은, 국민들이 그것을 볼 수 있고 선조들의 예술의 깊이를 공감하며 감동이 더해질 때, 작품은 더 반짝반짝 빛나고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지 않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 한 시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