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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l 04. 2020

벌이는 다르지만 처벌의 무게는 같았으면

주변을 살피는 것에 무심한 사람임에도 가끔 사회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기사를 제목만으로 스쳐 지나치다가 관심이 가서 찬찬히 읽어보면 이건 아니지! 싶은 순간들이 있다. 댓글 창을 누르고 파편처럼 튀어 오르는 말을 입력한다. 생각이 앞서가니 손도 앞서가고 글자가 좀 틀리면 어떻냐며 입력을 누른다. 숨도 쉬지 않고 즉답을 한 사람의 헝클어진 생각들이 입력되어 있다. 맞춤법도 틀리고 문장도 앞뒤가 맞지 않지만 입력된 내용은 진심이다.


얼마 전,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고 피의자 바꿔치기 혐의까지 있던 전 국회의원의 아들에게 1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죄질이 가볍지 않다"라고 지적했지만, 막상 판결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의 형이 선고됐고 그는 풀려났다.


이 기사를 접하고 댓글을 썼다. 이른바 '윤창호 법'(윤창호 법은 음주운전으로 인명 피해를 낸 운전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는 내용의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 개정안’을 말한다.)의 적용을 받아야 했던 사례였다. 법의 엄중함을 보여 주어야 마땅한데, 어이없게도 그는 그렇게 풀려났고 사건의 파장은 길지 않았다. 내가 당한 것처럼 억울했다.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없으니 뭐라도 외치고 싶었다. 그렇게 댓글 창에 흥분되고 억울한 마음을 전했었다.




비우는 삶을 실천해볼까 하여 선택한 박현선이 쓴 <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가게에 갈까?>라는 책에, 그 나라를 단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법규를 어긴 것에 대한 처벌 사례 하나가 서두에 나온다.


"2002년 전직 노키아 디렉터였던 안씨 반요끼(Anssi Vanjoki)는 오토바이를 타고 속도 제한 시속 50킬로미터 구간에서 시속 75킬로미터로 달렸고, 그 결과 속도위반 과태료로 11만 6000유로(약 1억 5500만 원)를 지불했다." 핀란드에서 "자동차 속도위반이나 신호 위반 과태료는 그 사람의 연봉에 따라 다르다. 사람마다 벌이는 다르지만 벌금의 무게는 같아야 하니까."(p.26)


소득 수준에 따라 벌금에 차이가 있다는 말에 강한 충격이 왔다. 어쩌다 한 경우겠지 싶어 다른 사례를 검색해 보니 그 나라는 그렇다고 하며 비슷한 사례가 따라 올라왔다. 이런 나라도 있구나 싶었다.


최근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던 재벌 부회장의 재판에 검찰 수사심의위원회 소집되었다. 검찰 수사심의위원회는 재벌 부회장과 그가 소유한 회사에 대한 수사 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했다. 언론에서는 그것이 국민의 압도적 판단인 것처럼 보도했고, 재벌은 이미 면죄부를 받았다며 언론에서는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4조 5천억의 부당이득 취득했다는 혐의다. 4조 5천억 원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전혀 실감 나지 않는 금액이다. 다만, 이번에 전 국민에게 지급한 재난 기본소득의 예산은 14조 2천억 원이다. 불법 취득한 돈 4조 5천억, 아는 게 없지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대놓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의 민낯은 몹시 불편했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 <코끼리를 쏘다>에서, 조지 오웰은 제국주의 경찰로 버마에서 사람을 해친 코끼리를 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는 코끼리를 보자마자 쏴서는 안 된다는 걸 완벽하리만큼 확실히 알았다고 말한다. 멀쩡한 코끼리를 쏜다는 건 '거대하고 값진 기계장치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스스로도 자신 없었던 코끼리를 쏘는 그 일을 피하고 싶었다. 자신이 코끼리를 죽이는 것을 '거대하고 값진 기계장치'를 파괴하는 것에 비유했다. 식민지 시민 하나를 죽였을 뿐인데 '거대하고 값진 기계장치'를 파괴하는 것까지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코끼리는 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코끼리가 잠잠해지길 기다리다 조용히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그는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라고 말한다. 그의 뒤에 그를 따르는 2000명의 의지가 그로 하여금 그들의 뜻을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자신이 코끼리를 쏠 것이라고 그들이 기대하고 있었으니 쏴야만 했다고 고백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세상의 일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사건들이 마주한다. 나 하나 나서서 댓글 단다. 그것에 대해 말한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 잘 안다. 그럼에도 혹시 2천 명, 2만 명의 얼굴을 누군가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도 이내 포기를 하는 지점도 있다.


범죄 사실에 대한 핀란드의 법적 처분, '벌이는 다르지만 벌금의 무게는 같아야 한다'는 이 원칙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권력이나 부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법적 처리를 말하는 것은 돈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선량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 단죄하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 돈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한 무게는 같았으면 하는 것이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 하고 말을 이어가는 연설을 가끔 마주한다. 나 역시 우리나라를 위한 작은 바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너무 큰 바람이었던가 싶다.


그럼에도 바람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위치는 다르지만 벌금의 무게가 같았으면 좋겠다. 벌이는 다르지만 형벌의 무게는 같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혹시 내가 잘못해서 처벌을 받더라도 억울하다는 이상한 마음 없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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