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저무는 것에 대하여

by 바람

먹다 남은 달콤 짭짜름한 과자 한 봉과 커피, 생수 한 병, 그날의 날씨에 맞는 적절한 외투를 챙겨 집을 나선다. 차 뒷좌석은 마구 던져 놓은 짐으로 가득하다. 지저분해 보이지만 개의치 않고 출발한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순간 마음만 먹으면 떠남이 어렵지 않다.


오가는 길을 번갈아 운전을 할 수 있어 서해에서 동해로 어느 구석이든 그곳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장터도 들르고 낯선 길도 걷는다. 아니다 싶으면 되돌아 나오면 그만이다. 낯선 타국에서의 여행처럼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나라 내 땅에서 못 갈 곳은 없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고창 방향으로 나가 조금 더 달리면 구시포 해수욕장이다. 도착한 시간이 마침 일몰 시간이었다.


여행지에 가면 언제나 일출을 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번번이 일출의 장관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구름에 가려져 있거나 일출 시간이 어느새 지나 있거나, 지켜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언제 올라왔는지 모르게 해가 두둥실 공중에 떠 있거나 했다. 일몰도 그랬다. 마음먹고 기다리기에는 저녁은 짧고 어둠은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막상 마음먹고 기다리면 잔뜩 낀 구름 뒤로 온통 붉은빛만 먹먹하게 뿜어내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곤 했다.


생애 처음 일몰을 생생하게 마주했다. 일몰 시간 19시 4분. 현재 시간은 18시 51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조금만 기다리면 바다와 마주하는 일몰의 장관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바닷가를 응시했다. 조금씩 해가 떨어지며 노랗게 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것이 차츰 밑으로 가라앉았다. 들어오는 바닷물이 일몰의 파장을 더 신비롭게 만들어 주었다.



인적이 드문 바다.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온 가족과 연인 그리고 노부부, 대표성 있는 집단을 모집해서 하나씩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모래는 푹신했고, 부드럽고 고운 모래의 촉감이 운동화의 쿠션을 통과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단단한 지반 위에 넓게 깔린 질 좋은 매트리스의 느낌이었다.


지는 노을을 보며 나이를 세어 보았다. 어느새 인생의 황혼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는 적절한 통증과 불편함으로 서른을, 마흔을, 쉰을 넘어섰다. 자립에, 미혹되지도 않고 천명을 안다는 말과는 다르게 자립은 힘겨웠고 온갖 것들에 이끌렸고 깨달음은 늘 뒤늦었다. 이제 곧 예순의 고개도 다가올 것이다.


귀도 순해진다는 이순쯤 되면 나의 까칠함이 잦아들게 될까. 오히려 가시를 세울 것 같아 걱정이다. 생애 주기마다의 고비처럼 몸이 더 크게 반응할까, 말은 느리고 낮아졌지만 마음은 더 뾰족하게 날을 세울까 염려가 된다. 속 좁은 이기심이 혹시라도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 거칠게 들이댈까 조바심도 난다.


언젠가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UN에서는 청년의 나이를 65세까지로 잡았다고 소개했다. 고령화 시대에 따른 인생 나이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취지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갑자기 지나온 단계를 부정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 같아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간의 흔들림과 거친 나이 들기는 핑계 삼아 했던 투정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중년은 되어야 황혼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UN의 나이 기준이라면 아직 청년도 지나지 않은 나이가 스스로 낯설고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처신이 순식간에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 해결할 수 없는 숙제를 받은 듯싶었던 날이었다.


서른이 넘어갈 때까지도 지금의 내 나이 때의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책 없이 막연하게도 떠올리지를 않았다. 모습이 변해간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나. 생각도 해 보지 않았던 나이가 되고 보니, 외모는 변하는 수많은 것들 중의 작은 하나였을 뿐, 그 밖의 것들의 변화가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많았다.


무릎에서 나는 소리, 눈가의 깊은 주름, 길을 걷다 반듯하지 못한 기우뚱 흔들리는 몸의 느낌. 멀리 있는 것을 잘 보려고 교정을 한 눈이 어느 순간 가까이에서 보이지 않을 때, 매끈하게 펴지지 않고 조금씩 굽어지는 종아리, 손등의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핏줄과 탄력 없이 늘어지는 피부. 그 모든 상황마다 저절로 애틋하다.


지는 해에 소원을 비는 것을 그만 놓쳤다. 평화로움과 안식보다 그날의 노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해가 자취를 감추니 이내 어둠이 찾아들었고, 움직이는 차 안에서 심하게 멀미가 났다. 저물어가는 나이에 시드는 느낌이 잠깐 들떠 있던 마음과 부조화를 만들었던 날, 우울함을 치우려고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