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냉장고 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

by 바람

8일 전 아침, 김치냉장고가 수명을 다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작은 시누이가 선물로 마련해 주었던 것이었다. 갑자기 딱! 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빨간 불꽃 비슷한 것이 번쩍번쩍했다. 마침 평소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 자세를 잡고 거실에서 열심히 책 읽고 필사하던 중이었다.


불이었다. 급한 마음에 후다닥 달려갔고, 벽에 옮겨 붙을까 싶어 그 무거운 냉장고를 단번에 끌어 냉장고를 돌려놓았다. 불꽃이 이는 지점을 보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혼자 우왕좌왕하다 개수대에서 물을 받아 냉장고 뒷면에 들이부었다. 세게 붓는다고 했지만 물은 불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엉뚱한 방향으로 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눈앞에 전기코드 2개가 보였다. 하나는 김치냉장고가 분명했지만 다른 하나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모두 코드를 뽑았다. 푸스스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이 잦아드는 것 같더니 이내 꺼졌다. 나중에 생각하니 코팅된 전선을 녹이며 나는 스파크 소리와 튀는 불꽃이었던 것 같았다.


옆에서 바로 지켜보았기에 다행히도 빨리 수습을 할 수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났어도 전선이 탄 독한 냄새가 계속 났지만, 이게 불꽃이 튄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을음이나 화재의 흔적은 벽에서도 냉장고 뒷면을 봐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니 냄새도 거의 사라졌고 여전히 있던 자리에 낡은 테이블처럼 놓여있다.


5년 전쯤, 오래된 김치냉장고에서 불꽃이 일어 가정집에서 화재 사고가 있다는 뉴스를 접했었다. 그 원인이 김치냉장고 뒤쪽의 먼지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도 이미 우리 집 냉장고는 오래된 것이어서 한껏 겁을 집어먹었고 곧바로 냉장고를 당겨 뒤쪽을 살펴보았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기름때와 먼지가 뒤쪽에 뽀얗게 쌓여 있었다. 예방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단 닦을 수 있는 만큼은 닦아보자 생각했고, 코드를 뽑고 나사를 풀어가며 열심히 청소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 김치냉장고 뒷면 청소였던 것 같다. 청소를 하고도 그 후 한 달 정도는 긴장된 마음을 갖고 지냈다. 10년도 훨씬 넘은 우리 집 김치냉장고가 언제 불꽃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뉴스에 나오는 화재 사건이 우리 집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고는 이내 김치냉장고는 나의 걱정거리 밖으로 사라졌다. 이후 한동안은 뉴스에서도 김치냉장고의 발화 사건은 더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집 김치냉장고가 오래되었다는 사실도 잊혀 갔다.


수명을 다한 김치냉장고 안의 물건들을 꺼냈다. 요즘 드물게 가사에 열중하는 중이고 냉장고 파먹기를 실천하고 있던 차라 쓸모없이 쟁여놓은 오래된 것들은 없었다. 반통 정도 남은 매일 먹는 김치와 대용량의 음료수, 어머니가 보낸 매실과 고추 장아찌 정도였다. 다행히 큰 냉장고도 같은 이유로 자리가 여유롭게 남아 있었고 냉장고로 물건을 옮겨 넣어도 무리가 없었다.


"김치냉장고 없어도 되겠네."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도 당장은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남편이 그렇게 얘기하니 묘하게 그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김치냉장고 없이 살아보기 어때?"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딸까지 한 마디 거들었다. 당장은 괜찮다고도 생각했지만 애써 부정했다. 기껏 가져온 핑계라는 것이 아직 먼 김장 핑계였다.


"김장하면 김치는 어디다 두고..."

다시 생각해도 옹색한 핑계였지만, 김장을 끌어오지 않아도 당연히 사야 하는 것의 유예 기간은 일주일 정도라고 생각했다.


고장 난 첫날, 더는 쓸 수 없는 김치냉장고 안과 밖을 깨끗이 청소했다. 고장 나 버려지지만 깨끗한 상태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2-3일 동안은 코드가 뽑아진 김치냉장고를 매일 열었고 생각한 물건을 꺼내려고 했다가 아차 싶어 닫기를 반복했다. 아예 치워버렸으면 그런 어이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겠지만, 새로 사면 쓰던 것을 회수해가니 그 자리에 새것을 놓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3일 째부터 테이블의 기능을 하는 김치냉장고 위로 자잘한 물건들이 놓였다. 문을 안 열어도 되니 이리저리 치워야 하는 수고로움은 없었다. 반통도 안 남은 김치가 있을 뿐이니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불편함이 안 느껴졌다. 평소에도 과일이나 채소는 조금씩 사 오는 편이고, 찬거리나 고기를 냉장고에 쌓아 두는 집도 아니었다.


'어라! 이대로면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이상이 없잖아! 이건 계획에 없는 건데...'

가족들 말대로 냉장고 없이 사는 실험적인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5일이 지났어도 김치냉장고 없는 일상은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6일째,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코로나로 인해 김치 담그는 열혈 주부가 된 뒤로 김치를 할 때마다 조금씩 양을 늘려 제법 많은 양의 김치에 도전했었다. 그간은 김치냉장고가 있어 냉장고 사정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 도매시장까지 가서 김치거리를 잔뜩 사는 순간에도, 옆에 청과물 도매시장에서 과일을 욕심껏 살 때에도 냉장고 사정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수박을 파는 곳 앞에 서서는 수박의 크기 때문에 냉장고 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냉장고에 들어갈 자리가 없을 것 같았다. 지천으로 널린 수박은 다음에 먹자고 생각했고 아쉬운 마음으로 지나쳤다.


천 원에 두 단, 실감 안 되는 가격에 덮어놓고 많이 산 열무와 한동안 가족들이 잘 먹은 알타리를 그야말로 넉넉히 샀다. 많이 사도 가격은 소매가격에도 미치지 않았다. 담그고 나니 김치냉장고에 들어가는 김치통으로 3통이 만들어졌다. 익을 때까지 밖에 둔 김치는 날이 더우니 만 하루도 지나기 전에 익은 냄새를 솔솔 풍겼고 냉장고에 들어가야 했다. 애초에 김장까지 생각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당장 담근 김치도 넣을 곳을 걱정해야 했다.


과일은 야채칸을 모두 차지했고, 김치통 세 개가 나란히 그 위에 칸에 차곡차곡 쌓였다. 마음은 뿌듯한데 갑자기 답답해졌다. 뭘 더 살 것도 아니지만, 뭘 더 사도 넣을 곳이 없다는 사실이 드디어 김치냉장고를 사야 한다는 당위로 다가왔다. 냉장고에는 김치통 말고는 그날그날의 식재료, 찌개나 무침을 만들 채소와 양념 정도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어 있을 때는 크다고 생각했지만 채워지니 턱없이 좁고 작게 느껴졌다.


8일이 지났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 오지 못한 수박은 아직도 못 먹고 있다.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가 먹어야 하고, 사온 그대로 먹는다 해도 한 통을 한 번에 해치우기는 무리다. 음료도 1.5L 딱 한 개, 물병도 딱 한 병이 냉장고에 겨우 들어 있다.


처음엔 쓰던 가전이 없이 살 수는 없다고 생각에서 무조건 사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김치냉장고가 없는 상황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일이었기에. 김치냉장고가 없는 일상이 얼마 안 되었지만, 지금은 많이 냉정해졌다. 김치냉장고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대형은 아니라도 지금 사용하던 120L 용량이나 그보다 한 사이즈 큰 정도면 우리 가족에겐 충분할 것 같다.


가족 모두가 집콕인 상황에서 삼식이 가족을 거느린 주부에게 부엌에서의 피로감을 덜어주려면, 일주일 정도의 부식은 냉장고에 채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지금은 과일이 한창인 계절이다. 제철 과일을 이때 아니면 언제 마음껏 먹을 수 있을까 싶다. 또 차가운 것만 찾게 되는 때에 정수 기능만 있는 뜨뜻한 물을 마실 수는 없다.


우리 집 김치냉장고는 19년을 사용했다. 남들에 비해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10년 정도인 평균 수명에 비해서는 잘 사용했던 것 같다. 슬슬 가족들의 입에서도 냉장고에 넣을 데가 없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냉장고에는 테트리스 쌓기처럼 빈틈에 오이나 호박, 양파나 두부를 잘 숨겨 놓았다. 이쯤 되면 막상 필요할 때 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냉장고에 보관해야 할 것들을 모두 넣다 보니 잘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것이 있는지 잊게 되고, 그러다 보면 냉장고 안에서 시든 채로 있는 것도, 버려질 것도 곧 나올 것 같다.


처음에 일주일 내에 무조건 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조금 여유를 갖기로 했다. 이참에 김치냉장고 없이 살았던 시간으로 돌아가 그때의 마음과 견주어 보기도 하고, 김치냉장고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많은 편리함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가졌으니 김치냉장고 없는 시간이 쓸데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주말, 혹은 다음 주말에 김치냉장고를 사게 된다면, 더는 냉장고에서 버려지거나 썩어나가는 것 없이 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철 과일과 시원한 음료와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썰어 놓은 시원한 수박도 한껏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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