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 인생의 사보타주를 완성하다

<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by 바람

누구에게나 숨겨진 삶이 있다. 아니 눈에 띄지 않는 삶이 있다. 글을 쓰다 하나의 기억을 잡고 따라가면 그 기억의 끝에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는 다른 기억이 있다. 냉큼 붙잡으려고 애써도 도무지 보여주지 않던 기억은 다른 날 다른 단서를 만났을 때 또 한 귀퉁이를 슬쩍 보여준다. 가느다란 실 끄트머리 같은 희미한 흔적은 쉽게 만나기 어렵다. 그런 기억의 파편들이 꿈속에서 언뜻 등장한다. 양철 문을 열고 나선다. 문 옆 수돗가에 누군가 앉아 있다. 궁금해 고개를 돌려 마주하려는 순간 사방이 뿌옇게 변하고 이내 지워지고야 마는 그런 기억들. 메모 한 조각 남지 않은 그 기억들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젤리의 문장처럼 뿌려 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뇌의 어떤 부분인가를 자동 차단 기능을 사용한 듯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기억들. 그러게 사라진 삶, 그 조각들.


파콤 제브뢰즈와 베르강스였던 셀레스트의 아들이며 피에르 에프렘인 피에르 제브뢰즈, 이름만큼 복잡한 그의 삶은 사빈의 집에 들어와 아이들의 후견인으로까지 깊숙이 자리를 잡는다.

‘뚜드 드 리앵’(無의 질주), 저는 완성을 지향하지 않아요. 살아남는 일 자체가 저에겐 이미 아주 절묘한 노동이거든요.

그는 도전은 ‘판단에 근거한 용의주도한 결심보다 우연한 판결에 따라 선택’되었다. 그의 우르푀빌에서의 삶은 사빈과 그녀의 딸 마리에게, 큰아들 앙리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시간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그에게 공간은 무의미하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피에르는 방황을 잠시 멈춘다. 무미건조한 반복에서 벗어나 ‘정체에 불과한 방황의 도주’를 쉬기로 한다. 엄청난 방문객이 되어 사빈과 마리, 앙리의 세계로 들어간다.


정현종의 <방문객>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피에르의 방문은 당사자인 그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우르푀빌의 가족들의 미래를 요동치게 만든다. 일곱 살 적부터 한 발을 무덤에 두고 살고 있던 마리와, 얼어붙은 기억 속에서 고요한 부동의 상태로 휴면 중인 사빈의 삶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변화가 시작된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균형을 잃은 마리는 ‘균형을 되찾기 위해 이따금 과도한 상상력에 기대’게 된다. 그런 식으로 ‘처참하게 찢겨나간 현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실로 고쳐 깁는다.’ 아버지가 낸 사고로 그녀의 오른발은 으깨어졌지만 마리의 상상 속 인물 조에는 무사하다. ‘기민한 유체의 속성을 가진’ 덕에 조에는 온전히 살아남았다. 사고가 난 순간 차창 밖으로 내던져진 조에는 나무에 세게 부딪히는 대신 ‘요정처럼 나무 속으로 침투해 거처를 바꾼다.’ 마리는 그렇게 멀쩡한 자신을 만들고 타자화하여 숨겨놓는다.

피에르를 만나고 마리는 ‘왜 어른들은 변장을 하고 있을 때만 흥미로운 존재가 되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피에르는 다르다. 가면을 벗은 그는 마리의 집에 들어와서도 끊임없이 마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마리는 사전을 성탄 선물로 선택한다. ‘단어들의 내장을 파헤치고 그 머릿속을 달리는 해충들을 추적’하고 싶어서다. 으깨져 없어진 다리는 마리의 성장에 따라 분노와 충동질로 따라온다. 그녀가 성장하며 느끼는 분노를 잠재우게 된 사건은 피에르의 실종이다. 피에르는 젤리의 뿌려진 문장을 남겨 그녀의 추적을 기꺼이 돕는다. 마리는 어린 시절 친구인 조에와 나이가 동갑이고 비슷한 괴벽을 지닌, 젤리라는 이름의 소녀를 등장시킨 상상 속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난 오래전부터 요다음에 크면 나무가 되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책이 되고 싶어요. 한 장 한 장을 바람과 벌레, 햇빛과 비, 새와 달빛으로 쓴 나무책이요. 봄이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져 여름에 빛을 발했다가 가을이면 잎이 떨어지고 겨울이면 사라지겠죠. 그렇게 끝없이 다시 시작될 거예요.

젤리의 뿌려진 문장은 마리의 책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해서 피에르의 숨겨진 삶의 하나인 젤리는 마리를 통해 부활한다. 마리를 통한 젤리의 해방은 피에르의 해방이며 마리의 해방이기도 하다. 마리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된다.


9년간의 동거. 무수한 시간 속에서 많은 삶의 조각들과 그것들끼리의 충돌을 안고서 피에르는 깊숙이 침투한다. 은밀하게,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그의 숨겨진 삶이었던 셀레스트와 젤리의 삶을 그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녹여낸다. 사빈과 마리를 통해 셀레스트와 젤리의 사보타주를 완성한다.

사빈과 마리와의 만남은 ‘숨겨진 비극이 보이는 것과 마찰을 일으키다 포옹하며 접촉하는 과정에서의 수축과 팽창의 이중의 운동’이다. 사람의 기억이 깨어나는 과정은 빅뱅을 연상시킨다. 로스코의 복제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중의 잠금이다. 로스코의 화폭 속에 피에르는 내면의 삶, 눈에 띄지 않는 삶을 묻었고, 앙리는 그림을 통해 피에르를,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찾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림을 마주하고 그 느낌에 집중하던 중, 그림이 아닌 자신의 호기심과 통찰력을 충족시켜줄 르포르타주 사진 분야, 자신의 길을 찾는다.


피에르의 엄마 셀레스트에게 남편 파콤과 그의 숨겨진 사람 에프렘의 폭력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파콤이 독일군에 의해 유배된 후, 셀레스트는 독일군 요한과의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 폭력의 상처를 극복한다. 전쟁이 끝나고 셀레스트의 사랑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모욕이 되어 돌아온다. 또 그녀의 사랑은 아들 피에르와 딸 젤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폭력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구원을 위한 사보타주를 완성하지 못한 채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피에르는 동물원 거북이 울안에 그녀의 육신이 묻는다. 남겨진 그녀의 사보타주는 가족이라는 굴레 안에서만 인정받는다. 젤리의 사보타주는 마리를 통해 완성된다. 어린 나이에 자살한 젤리는 책을 통해서, 마리의 자유분방한 표현을 통해 폭력에서 해방된다. 피에르는 결국 사빈과 마리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사랑과 속임수의 사보타주의 시기를 끝장낸다.


1976년 9월 29일 우르푀빌의 공연, 전통 가치들의 붕괴이자 지성에 대한 모독이었던 우스꽝스러운 유희의 연극 ‘가뷔조뫼’(1968 프랑스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샤독> 시리즈에 나오는 말. ‘가·뷔·조·뫼’ 네 글자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 연극은 마치 가족의 의식을 해체하고 단순한 상황으로 그들의 일상을 흔들고 제멋대로 정리한다. 의식 저 밑바닥에 가려져 있던 숨겨진 삶이 발견되는 순간 연극의 의미는 강렬해진다. 욕망으로 불타거나 제풀에 지쳐 사그라들거나 혹은 만족한 웃음을 띠거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자신을 타자화한 채로 제각각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 연극에 참여한 가족들(배우들) 모두는 자신들이 선택한 방향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피에르의 침투는 결국 각각의 해방을 이끈다. 누군가의 사랑을 맘껏 증오하거나 모욕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구속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 파격이기도 하다. 인생의 절정은 서로 절묘하게 어긋나 있기에, 절묘한 어긋남의 어느 귀퉁이에서 참여한 사람들만큼의 다양한 색채로 무대가 실현된다.


무대가 끝나고 자신을 조롱하는 샤를람으로부터 자신을 더 쉽사리 놓아버리기 위해 피에르는 떠났지만, 그 여정에서 자신을 되찾는다. ‘소예수’라는 그의 별명은 감당할 수 없는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빈 가족을 해체하고 구원한 것처럼 다른 이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돌아온 우르푀빌에서 사빈과 마리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과의 정면대결을 통해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한 내면으로부터의 벗어난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다른 곳에서 또 다른 ‘가뷔조메’를 완성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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