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udge>, 2014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정규 TV 프로그램보다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시간이 늘고 있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넷플릭스를 찾는다. 어떤 것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불특정 한 다수의 목록들 중에서 선택한다.
시리즈는 지양한다. 취향에 맞으면 푹 빠져 시청하느라 생활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대부분은 시리즈가 아닌 영화를 고르는 편이다. 재미없으면 백색 소음용으로, 재미있을 때도 길게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때문이다. 두 시간 정도의 감상이 내겐 딱 맞는 거 같다. 그런 이유로 선택된 영화가 ‘더 저지(The Judge, 2014)’다.
시카고의 잘 나가는 변호사로 능력과 재력을 겸비한 행크 팔머(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지역의 판사로 40년 이상을 복무한 투철한 직업 정신의 소유자인 아버지(로버트 듀발)의 이야기다.
행크는 재판 중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비 내리던 그날 밤, 아버지는 차를 끌고 나가서 사고를 내고 들어온다. 그리고 다음날, 경찰이 찾아오고 살해 용의자로 아버지를 붙잡아간다.
살해된 사람은 블랙웰. 처음 여자 친구를 총으로 협박해 잡혀 온 16살 블랙웰은 사죄하며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는 블랙웰을 통해 아들의 모습을 보았고 누군가 내 아들도 그렇게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를 안아준다. 판사인 아버지는 그에게 최소의 형량 30일을 구형한다.
형량을 채우고 나온 블랙웰은 여자 친구를 익사시켰고 20년형을 구형받는다. 형기를 채우고 나온 그가 바로 지난밤에 살해당했고 그의 피가 아버지의 차에서 발견되었다.
아버지는 기억이 없다. 살해의 기억은 물론이고 사고의 기억도 없다.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고용한 마을 변호사는 재판 경험이 부족하다. 결국 아들 행크가 아버지의 변호를 맡게 된다. 이미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어색하고 먼 사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변호하다, 행크는 아버지가 4기 암 환자이고 죽음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재판을 준비하며 아버지와 아들은 사사건건 부딪친다. 둘 사이의 지난 상처도 소환된다. 16살의 행크는 술에 취해 형을 차에 태우고 가다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그 사고로 인해 메이저 리그가 코앞이었던 형의 야구 인생은 끝났고,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재판에서, 그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소년원에 보내버렸다.
세상의 누구도 표현하지 않는 마음을 알 수는 없다. 대화 없이는 다가갈 수 없다. 그 사소한 진리를 부자지간에는 깨닫지 못한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냉랭했던 아들은 재판정에 선 아버지를 증인 신문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알게 된다. 블랙웰을 통해 자신을 보았다는 것과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블랙웰에게 선처를 베풀었다는 사실도.
행크의 아버지는 판사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는 너무 인간적이다. 법과 감정이 서로 충돌한다. 그가 아버지의 자리만 지켰다면 아들 행크는 소년원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판사의 직무로만 생각했다면 범죄를 저지른 아이에게서 반항아였던 자신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도 없었겠고, 그에게 지나치게 가벼운 판결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베푼 관용에 대한 배신감도, 술에 취해 빈정거리며 형편없이 사는 것을 보고 죽어야 할 인간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죽였을지도 모르는 살인도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법의 잣대로만 판단했다면.
부모된 입장에서 판사인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따뜻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아들에게 남들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지만 그는 아버지였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가혹하게 느꼈을 수 있지만. 그는 아들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말한다. 엄격함도 때론 자녀를 위한 최선으로 생각될 때가 있다. 결과적으로는 부자 사이가 갈라지게 된, 최선이 아닌 것이 되고 말았지만. 부모도 부모는 처음이라 실수를 한다.
나의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셨다. 집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아버지의 동생들은 결혼하고도 함께 살았다. 그들을 거두는 것이 장손의 의무나 책임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일까. 작은아버지들을 향해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재우고 먹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먼저 내어주셨고 그러면서도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7남매의 막내인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기억 이전의 집안의 분위기까지 알 수는 없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다 수용하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대가족의 뒷바라지를 눈물로 감당하셨다. 시어머니의 막내딸이며 나의 고모까지 업어 키우셨다니 어머니의 한 맺힌 푸념에는 남편에 대한 원망도 담겨 있었으리라.
두 분 모두 지금은 곁에 없다. 모든 것을 다 수용하셨던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속에 쌓인 것을 삭이느라 애를 쓰셨던 모습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안타까웠다. 나누고 베풀고 하는 말은 순화된 표현이었고 빼앗기고 속으며 살아온 것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남에게 오히려 관대했고 다른 이를 챙기느라 내 것을 지키지 못한 삶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가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편이고 우리 편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내 결혼의 바탕에 깔려 있었다.
철이 들고 나서는 아버지가 내 가족의 울타리만를 안정적으로 지켜주길 바랐다. 아버지는 가족의 울타리를 성실하게 지켰다. 아버지가 생각한 가족은 범위가 너무 넓어서 당신의 부인과 자식이 아닌 형제와 자매, 그들의 아내와 남편까지 확장되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그게 싫었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아버지의 마지막 회한이 그 범위로 인한 것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늦었지만 아버지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한다.
이제 부모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행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가혹했고 남에게 관대했다. 나의 아버지는 다른 이를 품느라 가족의 것을 따로 챙기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은 대부분 내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한 것 같다.
행크의 오래된 여자 친구 사만다(베라 파미가)는 행크를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관대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 표현이 묘하게 끌렸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이기적이며 관대한 상반된 조건을 갖춘 사람, 철없게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도.
그나저나 가족 앞에서도 직업윤리를 지키는 것이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하다. 때문에 최근 국회나 사법부에서 이해충돌(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이익을 보기 위해 다른 행동 동기를 변질시킬 수 있는)을 많이 논하는 것 같다. 이해충돌 상황은 직업과 이해의 경계를 법으로 재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위험하다. 따라서 배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이해충돌 방지법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법적으로 완벽하게 이해를 배제하더라도 돈의 유혹은 틈새를 파고들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