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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Feb 03. 2020

우연이 만들어 준 외출

우연히 아메리카노 2잔 무료 쿠폰이 들어왔다. 그런데 사용할 수 있는 장소가 멀었다. 포천에 있는 광릉수목원점에서만 사용 가능한 쿠폰이었다. 이런 쿠폰은 받아도 난감하다. 다행히 사용 기한 제한이 없어 시간의 여유가 있지만 마냥 미룰 것도 아니지 싶었다. 누군가에게 줄까도 생각했지만, 준다고 해도 그곳까지 가서 마시기에는 받는 사람도 부담스러울 것 같아 쿠폰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핑계 김에 우리가 가기로 결정했다. 커피 마시러 가는 김에 다른 곳도 둘러보고 바람도 쐬고 시간을 보내자고.


거창하게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주말 아침 무료할 때, 가볍게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지 찍고 한 시간 조금 넘게 달리니 목적지 근처였고 광릉이나 광릉수목원 등등의 유적지 안내판이 줄줄이 이어졌다. 우선 도착한 광릉수목원은 입구가 예약한 차량만 출입할 수 있다고 했다. 그제야 인터넷 검색을 했다.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다는 것과, 꼼꼼히 읽어 내려가니 예약을 하지 않아도 입장할 수는 있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찾았지만, 그곳은 그냥 패스하기로 했다.



수목원을 패스하니 광릉은 어떨까 생각하던 차에 차가 마침 그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차를 돌려 입장하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매스컴이 한창 시끄러운 상황이고, 확진 환자가 몇 명이라는 등의 말들이 있어 마스크를 챙겼었고, 그 영향 때문인지 오는 동안  도로도 한산했는데 이곳 광릉도 찾는 관람객도 거의 없었다. 마음이 느긋해지니 마스크는 턱에만 걸치고 입장했다. 세조 임금과 정희 왕후의 묘가 있는 곳.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 조선시대 왕릉은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역사문화관에서 세조의 국장 절차를 날짜별로 정리해 놓은 도표를 보았다. 승하 이후 이틀째에 목욕시키고 9벌의 옷을 입히고, 소렴 때 22벌의 옷을 입히고, 대렴 때 90벌의 옷을 입혔다는 안내 글이 적혀 있었다. 한 시간에 열 벌을 입혀도 아홉 시간을 내내 입혀야 되는. 헉! 돌아가신 임금님이 그곳에서도 왕으로서의 풍모를 유지하며 통치하도록 저승에서의 옷까지 마련해서 입힌다는 의미일까, 궁궐의 예법도 장례 예법도 모르지만 놀라웠다.



정자각에서 능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능선과 탁 트인 시야가 고즈넉하고 멋스러웠다. 왕릉이 위치하기에 충분히 넘치게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시절 빽빽하게 나무들이 들어선 산속에서 어떻게 이런 장소를 찾았을까 싶었다. 안내 책자는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하는 가을, 능까지 오르는 진입로의 전경이 찍혀있었지만, 나뭇잎 하나 남아있지 않은 포근한 겨울의 고요한 풍경도 충분히 멋스러웠다. 얼음이 녹아 질척한 땅을 피해 밟으며 올라갔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 큰 나무들이 밑동까지 잘려나간 채로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둥글고 크고 반듯한 나무. 어딘가에 사용하기 위해서 다듬어진 밑동의 나이테를 세어보니 백 삽 십 개가 넘은 나이테. 쓰러진 나무도 그 자체로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여러 모양으로 잘린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처 입은 채로 휘고 꺾인 모습, 잘린 밑동 위로 잔가지를 키우는 모습, 이끼를 잔뜩 품고 있는 모습, 두셋이 앉기에 충분한 자리를 내어주는 모습 등. 오래 살았고 오래 수고하고 오래도록 고마운 모습으로 보였다.



한 시간 남짓의 산책을 마치고 왕릉을 나오니 점심시간, 메밀 막국수와 메밀 돈가스로 배를 채웠다. 메밀 싹에 겨자 소스를 입힌 샐러드가 새콤 달콤 싸르르한 미각을 자극했다. 비빔 메밀국수의 양념도 충분한 양념의 양에 비해 맛이 강하지 않아 시원하게 먹을 수 있었다. 드디어 커피 쿠폰을 사용할 순간이다. 광릉수목원점 투썸플레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크림을 테이크 아웃해서 돌아오는 길, 내가 사는 부천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 환자가 생겼다는 뉴스를 접했다.



검색을 하니 절반 이상이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기사다. 주말이고 오가는 길이 늘 막히던 도로를 막힘없이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덕인 것 같지만, 질병의 근원지로 들어오는 듯한 두려움이 마음 한편에 자리를 잡는다. 우연한 외출에 들떴던 마음을 일순간 가라앉게 만든다. 부정적인 전망만 가득하고 뉴스가 두려움을 지나치게 조장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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