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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Dec 09. 2019

누군가는 그들 편에 서야 한다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누군가와 함께 우르르 다니는 것이 귀찮다. 성격 탓이기도 하고 나이 탓이기도 하다. 남편과 둘이 다녀도 이야기 없이 그저 걷는 경우가 많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얘기하면 들어주고 공감한다. 그러고는 다시 침묵한다. 말이 이어지지 않아도 함께 하는 자리에 불만이 있어서일 것이라는 생각을 서로 안 한다. 그렇게 ‘쿨’해졌다. 이 정도면 개인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는 도서관마다 문 하나는 <개인주의자 선언> 표지로 도배되어 있다. 2019년 부천의 책으로 선정된 책이다. 그밖에도 초등학생을 위한 <꿈을 요리하는 마법 카페>와 만화 <토토 이야기>도 부천의 책으로 선정된 것이어서 눈을 돌리면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읽게 되었다. 포털의 만화를 가끔 들여다보곤 했는데, <토토 이야기>의 심흥아 작가는 즐겨보던 만화 <우두커니>의 작가여서, 도서관에서 진행한 작가와의 만남에서 강연도 들었다. 지인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신기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광고의 힘이라니. 지자체의 문화를 선도하는 힘으로 봐야 할까. 어쨌든 <개인주의자 선언>은 개인주의자, 더구나 합리적 개인주의자라고 말하는 이가 궁금하여 읽었고, 지역 도서관에서 비경쟁 독서토론을 진행하게 되며 다시 읽게 되었다.


공시생들이 모여드는 노량진에 십수 년 전쯤 다닌 적이 있다. 힘들게 취득한 교원자격증이 빛을 보려면 임용이라는 것을 준비해야 해서였다. 그곳의 시간, 온도, 족히 200명은 들어가는 강의실의 다닥다닥 붙은 책상과 의자, 일찍 도착해서 앞자리에 앉지 않으면 화면의 글씨도 잘 안 보이던, 절대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거리감이 떠올랐다. 내 뒤로 앉은 무수히 많은 임용 준비생들의 표정, 그들의 피로와 졸음, 강사가 내뱉는 허공에 향한 뼈 때리는 농담 사이로 비싼 강의료의 본전을 뽑아보고자 벌이던 사투. 그곳에서는 절로 투사가 되었다.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는 강의실을, 사람들을, 두꺼운 교재를, 수없이 몰려드는 온갖 용어들을 견뎌낼 수 없었다.

대학원 졸업하고 그곳에서 4개월을 공부했다. 만성 두통을 맞이했고 보기 좋게 낙방했다. 시험이 무서워졌다. 다시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 자격증을 갖기까지의 공부가 헛것이 되는 것처럼 가치의 몰락을 경험했던 순간이었다.


책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희생의 시간을, 자신들의 현재를 견뎌내는 방법이,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 자신들의 하루하루를 스스로 이해하고 위로하는 모습들이,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삶에 냉정할 수밖에 없는, 박탈감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의 모습들이 나온다.

대학 인권 수업시간, 선생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 이슈를 제기하자 3분의 2 이상 학생은 이렇게 반응한다. “처우 개선과 정규직 전환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지금 대학생들이 왜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 그런데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남들 몇 년씩 어렵게 준비해서 토익 900점 넘기고 어렵게 공사 들어가는데 (…) 정직원을 넘보는 건 도둑놈 심보라고 볼 수 있죠? (…) 정직원 되고 싶으시면 시험을 치고 정정당당하게 들어가십시오.”     

그들의 목소리의 깊이를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현실도 헤아리기 힘들다. 누군가의 평화와 행복은 타인의 노동과 고통을 바탕에 깔고 있고, 누군가의 이익은 그들이 위치한 자리를 더 선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날마다 항복하라는 목소리를 그들은 거부하며 분노하는 것은 아닐까.


톨스토이의 우화 <세 가지 물음>에서 지혜를 찾는 왕은 각계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한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정답은 아는 바와 같이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대학생들은 자신과 접촉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동료들과 경쟁한다. 그들을 밟고 일어서야 자신이 당당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 그렇게라도 당당해지는 것이 그들이 핏발 선 눈으로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값싼 끼니를 때우며 강의실에서 노량진에서 비좁은 책상 하나를 앞에 두고 불편한 의자에서 버티는 이유이다.


그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 차가운 목소리를 낸다. 취업을 준비하며 느끼는 불안감과, 좁은 문을 향해 매섭게 달린 결과는 그들을 배신할 가능성이 크다는 두려움이 있다. 자리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현실 인식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에 날을 세우게 만든다. 정규직 전환을 희망하는 사람들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사람들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이 서 있는 바닥도 냉혹하다. 세찬 바람이 온몸을 흔드는 벌판이고 간신히 그 바닥을 딛고 버티고 있다. 보다 조심스럽고 촘촘한 법망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접근할 문제지 두루뭉술하게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서로를 자극하여 해결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를 꿈꾸는 사람, 무법의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검찰을 유일하게 부분적으로 통제하고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집단, 저자는 그곳에 속한 판사이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 사법고시까지 성적 경쟁에서 연속적으로 최고의 성취를 이룬 그가 ‘수직적 가치관을 버리고 수평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성숙한 가치 상대주의가 내면화될 때까지 의식적으로 다름을 존중하고 가치의 미덕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외치며 공정한 룰을 이야기한다. ‘직업은 직업일 뿐 자신의 전부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취미 활동, 봉사, 사회 참여 등 다양한 행복 활동을 병행’하라고 권유하며, 그렇게 건강한 사회를,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공감하기 어렵다.


저자는 판사로서의 삶 자체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야심도 없고 주변의 큰 기대도 부담스럽고’ 자신의 일을 ‘간섭 없이 창의적으로 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시간을 갖길 원한다’고 말한다. ‘사회의 끔찍한 불의와 비극’에서 혼자만의 행복 추구에 대한 질타는 ‘부채의식’으로 마음 구석에 있지만, 미안함으로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다고도 한다. 저자는 가성비 좋은 행복 전략을 이야기하며 직업에 집착하지 말 것을 권한다. 정작 자신은, 자신의 직업이 혼자만의 행복추구의 길과 사회와 함께하는 행복을 만들어 주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여러 활동을 경험하며, ‘위험을 분산하면 행복할 기회가 늘어나’서 ‘행복의 플랜 B, 플랜 C를 계속 만들' 수 있고,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과학을 규명을 할 수 있다고 하며’ 자기 재능과 열망의 크기에 따라 합리적으로 선택’할 것을 권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먼 미래를 살지 말고 ‘지금, 여기’를 살아가기를, 삶 자체를 누리기를 바라는 순진한 합리적 개인주의자다.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런 행복을 말하는 사람이 꿈꾸는 사회의 지향점은 가치가 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저자는 노동자의 싸움을 이렇게 말한다. “골리앗에 맞서는 것이지요. 법정에서 노동자들은 보통 이길 수 없습니다.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변호사는 어떤 학자는 ‘그’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인 저자가 ‘그’의 편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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