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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Oct 30. 2019

지친 칼자국을 상처를 남기고

칼자국, 김애란(소설), 정수지 그림

이 땅의 또 다른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아파하는 그 이름 어머니. 어머니와 살갑게 지낸 자식이든 어머니와 불화한 자식이든 죽음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 있다. 착하지도 않은데 착한 척하며 살았노라고. 어른이 되기까지 한 번도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고 고민해보지 않았다고. 어쩌면 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서도 어머니의 삶을 깊이 돌아보지 못했다고 늦은 고백이라도 하자. 그래서 더 죄스럽고 아프다고.


<칼자국>은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소설의 형식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난 후, 뒤늦게 작가는 어머니가 꾸린 국수가게, 자신이 먹고 자고 자란 그곳, '맛나당'에서의 이야기, 사라진 시간을 소설로 남긴다. 어머니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이야기이며 가족의 이야기를 책이라는 통로를 통해 다시 만나고, 이제는 다른 사람도 초대할 수 있는 기쁨을 가진다고 덧붙인다.

 

어머니는 오래 칼국수 집을 운영해 왔다. 어머니는 칼질에 있어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고, 오랜 시간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한 사람의 자부심이 넘친다. 더불어 먹고살고 있다는 안도와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나오는 피로도 그 칼질에는 뒤섞여 있다. 그런 어머니가 국숫집을 운영하며 칼같이 지키는 원칙은 누가 한 발자국이라도 먼저 왔는지 본능으로 알아채고 그 순서대로 음식이 나가는 것이다. 순서, 이 원칙이 만들어진 계기는 한 여자가 갓 나온 국수를 거리에 쏟아 버린 일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본능이 알려주는 어머니의 처세인 순서, 그 사소함의 절대적 원칙과 함께 무디고 억세고 자기주장 강해 보이는 어머니는 누구에게든 존중받아야 할 인격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누군가를 거두기 위해 무심함의 가면을 쓰고 있다. 상대를 조용히 배려하는 한 사내의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가족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어머니가 드러난다.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는 순간의 감정의 동요는 어떤 의미였을까. ‘삶에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나는 때’라고 말하는 어머니는 어쩌면 화자가 알고 있던 어머니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심함의 반어라니.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칼을 쥐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한다. 그런 어머니의 몸뚱이에선 ‘계절의 끝자락, 가판에서 조용히 썩어가는 과일의 달콤하고 졸린 냄새가 났고, 어린 자녀에게 어머니의 몸뚱이는 고요하고 몸을 녹진녹진하게’ 만든다. 칼을 쥔 여자에게서 나타나는 진한 삶의 냄새. 노동의 냄새이며 삶을 위한 투쟁의 냄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칼질은 당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질긴 삶의 꼬리를 쳐내는 행위가 아닐까. 삶은 잠깐의 행복과 그 끄트머리를 질기게 따라붙는 불행이나 절망의 연속이니까. 하여 그것을 끊거나 끌고 가거나 그렇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었기에. 어머니가 쥔 칼은 따라오는 불행을 쉴 새 없이 쳐내는 유일하고 강력한 도구였을 테니까. 그렇게 조금씩 잘라내다 상처도 입고, 또 병증도 따라온다. 결혼했지만, 자녀는 알아도 모른다. 알 것 같으면서 모른다. 아픔이 눈에 보일 때만 말할 뿐이다. 약 드시라고, 병원에 가시자고. 돌아서면 또다시 엄마 찬스를 끼니때마다 사용한다. 딸은 엄마의 레시피를 모자란 사람처럼 묻고 또 묻는다. 어머니는 그런 딸의 질문을 즐긴다고 말하며. ‘된장찌개는 된장 넣고 끓이고, 미역국은 미역 넣고 끓이면 된다고…….’


평생 밥을 만들다 죽은 어미 앞에서 밥이 넘어가면 이상한 일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입에 밥을 넣기 위해 사셨다. 음식은 어머니에게로 길을 안내한다.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끼니때마다 밥을 먹는다. 위장 그득히 채운다.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고 그렇게 합리화한다. 그러면서 조문객이 오면 눈자위를 붉게 하며 고인을 이야기한다. 삶은 그렇게 잔인하고 치졸하다. 끝까지 자신을 위한 변명을 거듭할 뿐이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칼바람을 내며 만든 음식, 칼바람을 견뎌온 삶. 외줄 타기 하듯 수많은 풍파에 흔들리며 견뎌온 삶이 맑은 웃음일 수는 없다. 영정사진 속 어머니의 서늘한 웃음은 어머니의 삶을 투사할 뿐이다. 참고 누르며 스스로 억압한 삶에서 놓여 난 세상의 어머니들이 그래서 더 그립고 안타깝다. 어머니의 삶의 그늘이 늦게나마 마음 한구석을 찌르고 있어서, 삼킨 칼자국이 건네는 이야기가 아파서, 혹은 몰라봐서. 그러니 아파도 칼자국의 이야기를 오래 간직하자. 사라지면 그도 몸서리치게 그리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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