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엄마면 안 되나요?

- 아이 셋, 그녀의 이야기

by 바람

독립 영화를 만드는 그가 그녀를 만난 것은 문화센터의 영상제작과정에서였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요즘 유튜브가 워낙 인기를 끌다 보니 배우려는 사람이 많아 수강신청자는 모집인원을 훨씬 넘어섰다. 일찍 수강신청을 했던 그는 다행히도 수강의 행운을 안게 되었다. 그녀 역시 수강생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다른 교육 채널을 통해 영상제작 지원사업의 대상자로 독립 영화를 만들고 있었고, 소재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마침 그 전 주에 어떤 내용으로 영상을 담을지 고민하며 멘토에게 조심스럽게 사는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말했었다. 어떻게 사는 이야기, 누가 사는 이야기, 왜? …… 등등의 질문이 들어왔고, 사람마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을 것이고 그 사연을 연령대로 구분해서 들려주고 보여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냈었다. 좋을 것 같다고 말했고 조금 더 고민해보자고 하며 모임을 마친 상황이었다.


문화센터에서 같이 공부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출연 제의를 했다. 거절을 각오했고 그럼에도 물어야 할 상황이었다. 누구에게도 묻지 못하고 빙빙 돌리다가는 영화는 물 건너갈 것 같은 조바심도 그를 부추겼다. 의외로 흔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히려 그녀의 삶 자체가 별 볼 일 없어 영화의 소재로 담아도 되는지 걱정이라는 말과 함께. 처음에 카페에서 본 촬영에 앞선 인터뷰를 진행했다. 미리 스무 문항 정도의 질문지를 만들었었고 질문이 진행되며 생각지도 않았던 답변도 돌아왔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저마다의 사연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주 특별한 사연이었다. 인생 전부를 얘기할 수는 없었겠지만 아픈 시간을 진솔하게 얘기했고 중간중간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느라 멈추기도 여러 번 했다. 음성 녹음을 했지만, 영상으로 담지 않은 것이 실수라는 생각을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지나 온 삶을 훑어 이야기해 본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남편은 워낙 어려웠던 시절에 만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때그때 살기 위한 방편으로 얘기했던 것이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고 생소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이렇게 솔직할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랍다고 말했다. 그동안 보여주는 것보다 감추고 사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나를 말하고 싶다는 알 수 없는 욕구에 끌려 영상을 배우러 왔는데, 자신이 담는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영상에서 말할 기회를 얻어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들이 담길 영상이 부끄러우면서도 기대된다고도 했다.


촬영 전의 인터뷰는 그대로 살려서 내 보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한 사람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졌다. 그렇기에 본 촬영에 대한 기대가 컸다. 막상 영상을 찍으니 그녀는 긴장했다. 한번 이야기를 한 것이어서인지 날것 그대로의 삶의 느낌이 많이 희석되었다. 어설프게 포장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30대에 막 들어선 아이 셋의 엄마 주이의 이야기다.




1


주이는 오늘도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이 약속된 날이다. 누가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 놀이 같은 시간을 즐긴다. 다만 방송이 주는 긴장감이 준비하는 단계에서 스스로 위축되게 만든다. 아이들과 준비하는 시간, 사는 모습, 함께하는 놀이를 보여주는 것이 즐겁다. 영상을 보고 난 후 피드백되어 돌아오는 반응도 반갑다. 아이들과 신나게 즐기면 시청자들은 같이 즐거워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놀이를 최대한 다양하게 보여주자는 것이 방송의 취지다. 이 시간을 마음껏 즐긴다. 주이에게 숫자 5는 완전한 수다. 다섯의 완전체가 되어 놀이를 즐기게 된 것이 벌써 1년이다. 지난 1년은 주이답게, 아이들답게 만들어 주었다. 가족다워진 것도 이 시간 덕분이다.


이제 막 30대에 들어선 그녀에게 3년 전 셋째가 태어나며 가족은 다섯이 되었다. 완전체가 된 기념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숫자 5가 되니 주이의 가족에게 빈틈이 허용되지 않는 완전한 울타리가 쳐진 것 같았다. 지금의 완전한 울타리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지난 시절은 온통 빈틈 투성이었다. 아주 작은 틈새로도 세상의 모든 바람이 몰려들었다. 주이는 바람에 심하게 휘둘렸다. 앞에서 불어오면 뒤로 밀렸고, 뒤에서 불면 앞으로 넘어졌다. 쓰러진 바닥에서 어린 주이를 일으켜 세워주는 친절은 어디에도 없었다. 쳐다보고 외면하고 비웃었다. 가족은 있었지만 없었다. 가족들 중 누구에게도 기댈 언덕이 없었다. 이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도 불어오는 바람을 경계하고 막기에 급급했다. 바람은 언제나 사방에서 불었고 세상은 서로 기댈 처지가 아닌 듯했다. 각자 알아서 피할 곳을 찾아 나서야 했다.


세상을 모르는 주이였다. 이웃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고 친구는 너무 어렸다. 세상을 몰라도 그들이 바람막이가 아니라는 것은 금방 깨달았다. 거리로 달려 나갔다. 지하도 외진 곳, 계단 틈, 뼈대만 세워진 건물, 커다란 쓰레기통 옆의 자리 등, 거리의 법칙에 따라 오늘은 이 골목을, 내일은 저쪽 지하도를 헤맸다. 어둠이 덮치면 아무 곳에나 쓰러졌고 눈을 뜨면 바람이 일으켰다.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았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있었던가. 학교를 다녔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배움을 통해 지닌 말들도 없었다. 남은 말은 고프다, 자다, 버티다, 정도였다. 그러다 친구를 만났다. 어린 그녀를 조건 없이 대하는 어린 그와 울타리를 쳤다. 한 끼만 먹으면 족했고 하루만 살면 되었다. 그렇게 살아 냈다.


7년 전, 아이를 안고 나가면 애가 애를 키운다고 했다. 어린 엄마라서 저런다고 했다. 그 소리가 꼭 따라붙었다. 어린 엄마라서.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잘못되었다고 했다. 잘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어떻게 해야 좋은 엄마가 되는지, 그들이 원하는 엄마의 모습은 어떤 건지, 무엇을 고치면 내 아이의 좋은 엄마가 되는지 몰랐다. 그냥 엄마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왜 그냥 엄마면 안 되는지,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사람들은 아이를 걱정했다. 불안해 보인다고 했고 안전하지 않다고도 했다. 불편해서 아이가 우는 것이라고 거들었고 그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힘들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면 밖에서 돌아올 누군가가 간절했다. 늦도록 아무도 오지 않는 밤을 혼자 이겨내며 그냥 엄마를 꿈꾸다 깨다를 반복했다. 꿈에서 깨면 다시 밖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절실했고 견딜 수 없어지면 손목을 그었다. 절실함이 몸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도록. 후련했다.


다른 날은 다른 말을 들었다. 어제와 다른 엄마를 요구했다. 당당해지라고 했다. 그들도 젊은 엄마로 보였지만, 젊은 엄마로 보이는 그들은 젊은 엄마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에게서 자신들과 다른 모습을 찾아냈고 충고했다. 젊은 엄마인 주이는 젊은 엄마인 그들과도 구분되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젊은 엄마들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단어에 고개를 숙였고 부끄러운 스스로를 마주해야 했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몰랐으나 부끄러운 젊은 엄마가 되었다. 부끄러운 젊은 엄마의 하루는 힘들었다. 부끄러움에 지쳐 쓰러졌고,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싶었다. 머리를 숙이면 견뎌질까, 이겨질까, 참아질까, 묻고 싶었다. 물음을 품고 어둠에 힘들게 기댔고 해답을 기다렸다. 기다림이 절망으로 바뀔 때쯤, 다시 손목을 그었다. 절망을 흘렸다. 부끄러움도 같이 빠져나가길 바랐다. 누군가 이해해줄 것 같았고 자신도 곧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녀의 손목엔 지금도 진한 자국이 남아 있다.




2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주이를 찾지 않았다. 다섯 남매의 넷째인 주이, 그녀가 집을 나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궁금해하지 않아도 주이는 괜찮았고 익숙했다. 긴 시간이 흘러 지금은 오히려 가끔 엄마가 궁금했고 가족이 궁금했다. 정작 자신은 궁금하지 않은데 가족은 괜찮은지, 엄마는 어떤지 궁금했다.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잘 사는지, 밥은 먹었는지, 만날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찾지는 않았다. 그때까지 엄마도 여전히 주이를 찾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신기하게도, 찾지 않아도 가족은 연락이 되었고 만나 졌다. 피가 댕기나 싶었다. 무수한 밤을 이겨내며 흘려보낸 것들이 어쩌면 그들에게 닿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말 없는 서먹한 가족이었다.


주이의 아버지는 병이 있었다. 다섯 남매는 어렸다. 아버지의 병명을 몰랐고 묻지 않았다. 알았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병명이 가족을 더 무섭게 만들 것 같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아버지의 병과 싸웠다. 싸우며 돈을 모았고, 병원비를 댔고, 아이들을 저절로 자라게 했다.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닌 기억은 없었지만, 엄마 없이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기억과 엄마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기억은 분명했다. 졸업식장에서 자신 외에는 모두 가족이 있었다. 가족은 저렇구나 생각했다. 엄마는 표정으로 말을 대신했고 그런 엄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았는데 가슴은 답답했고 집이 답답했다. 입을 닫은 엄마와 길게 이어지는 침묵이 답답했다. 답답함을 견디기 싫었다. 묶여있지 않았는데 구속처럼 느꼈고 밤의 공포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신의 답답함과는 다른 종류의 답답함을 가진 아이들을 만났다. 그 아이들도 정답을 찾지 않았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지 않았고 그것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위로였다. 그 아이들은 살고 있었고 주이도 살아갈 수 있었다. 딱히, 삶이라든가 삶의 끝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살아지는 삶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에서 벗어나길 바랐고 간절했는데,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삶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지 않는 답답함 때문에 나왔는데 여기서는 답답함을 말하지 말아야 했고 모두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내가 살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와 만났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자신을 처음으로 돌아봐 주었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던 자신을 궁금해했다. 어린 시절을 얘기했고 가족을 얘기했다. 바쁜 엄마도 병든 아빠도 스스로 살아내고 있을 형제들도 얘기했다. 서로를 얘기하며 몰아치는 바람을 피했다. 감싸고 온기를 나누었다. 처음으로, 울타리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원망이 싹텄다.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을 때는 미움도 원망도 없었는데 기댈 곳이 생기니 원망이 가슴에 자리를 잡았다. 점점 커지고 분노가 일었다. 세상에 던져진 것부터, 찬바람으로 내몬 것,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 자신을 찾지 않은 것까지 화가 났고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들을 보지 않기로 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온기가 생기니 더 따뜻하지 않은 것이, 따뜻함을 더 일찍 느끼지 못한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가족을 버리기로 했었다.




3


엄마의 시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만이라도 따뜻했으면, 말이라도 건넸으면, 차라리 힘들다고 했으면, 이야기를 했으면……. 무엇이 힘들었을까. 병든 아빠가, 답답한 자신이, 바람막이 없이 알아서 살아가는 자녀들이 힘들었을까. 그녀가 젊은 엄마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는, 그녀의 엄마도 젊은 엄마여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냥 엄마를 하지, 그랬으면 절망을, 외로움을, 부끄러움을 흘려버렸으면 되었을 텐데. 그냥 엄마는 싫었던 걸까. 책임감이 있었던 걸까.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가족을 책임지고 싶었고, 아버지를 살리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주이가 그냥 엄마가 되어 아이들과 놀았던 것처럼, 엄마는 책임감으로 병원비를, 가족을, 아버지를 지켰다. 엄마의 무모한 책임감이 형제들을 아니 주이를 내몰았다고 지금까지도 생각했고 원망했다. 엄마가 붙잡고 싶었던 아버지마저도 결국 떠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젊은 엄마, 주이는 다섯의 완벽한 완전체를 이루었다. 몸은 힘들었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는데, 모든 것이 재미있었다. 소란한 북적거림이 튀어 오르는 음계 같았고 복을 몰고 오는 것 같았다. 다복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같이 했다. 함께 뛰고 만지고 구르고 부딪쳤다. 아이들과 같이하며 처음 경험해 보는 것들이 많았다. 무엇을 하든 아이들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도 그녀는 마음껏 놀아본 기억이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에 몰입하는 주이의 정신의 나이는, 아이들의 몸에 맞았고 아이들의 눈높이에도 맞았다. 뛰고 만지고 구르고 부딪치면 아이들은 좋아했다. 아이들은 주이를 이해했다. 주이를 향해 웃어주고 안아주었다. 불쑥 고개를 내미는 까칠함도 애들은 대범하게 넘겼다. 착하다고 말하며 눈을 맞추고 놀리고 장난을 걸었다. 주이는 완벽하게 아이들과 같았고 그냥 엄마가 되었고 완전체인 가족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주이를 창의적이라고 말했다. 생각이 아이들 같다며 부러워했다. 과거가 너무 힘들어서 그냥인 엄마라고 말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그냥은 하찮아 보였는데, 이젠 그냥 엄마인 주이를 칭찬했다. 둘러싼 모든 것이 새로움이었고 귀한 것으로 느껴졌다. 문득, 책임감 있던 엄마도 이렇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자신을 받아 준 것처럼, 자신도 엄마를 받아주었어야 했나 잠깐씩 생각했다. 주변에 넘실거리는 귀한 것들을 그녀가 잡은 것처럼, 책임감 있는 엄마도 답답하기만 했던 어린 주이도 넘실거리는 것들을 귀하게 받을 수 있었어야 했을까. 세 아이들은 주이를 향해 행복하다고 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주이는 책임감 있는 엄마를 더 이해할 수 없었다. 행복한 아이들의 엄마가 되니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늘 말해주는 것처럼 자신도 말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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