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가득 아침 풍경

유치원 가는 길

by 바람


아침 시간, 아파트 부엌 쪽으로 난 창에서는 오래도록 수런거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어른들의 출근 시간대의 차 시동 거는 소리도, 중·고등학생들 등교시간 자전거 타는 소리나 함께 뛰어가는 소리도 안 들리던 곳에서 초등학생들 등교부터는 꾸준히 재잘거림과 장난치다 나오는 비명, 뜀박질하며 부르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초등학교의 등굣길이 끝나면 이어 유치원생들의 등원 길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 부엌 조그만 창으로 보이는 유치원의 정경이었다. 옆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 시시각각 변하는 나무들의 색깔들, 유치원 아이들의 다양한 표정과 행동들, 겨울에 유치원의 둥근 지붕을 덮도록 쌓인 눈. 3층인 우리 집의 눈높이에서 시선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 바로 앞의 풍경들은,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지난 15년,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이 풍경이 만들어 준 다양한 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이사 오던 그해 겨울, 큰 눈이 내렸다. 50 센티미터 정도 쌓인 눈에 푹 파묻혀 있던 유치원의 아기자기한 창, 그 창에 붙어있던 다양한 그림 조각들을 다 가릴 정도로, 창틀 좁은 틈새를 비집고 차곡차곡 쌓인 눈. 방학이어서 아이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았고 눈을 치울 필요도 없어 숲속에 잠들어 있는 그림 같은 풍경 속에 내가 있었다. 밖에 나간 사람들의 출근길도, 돌아오는 귀갓길도 신경 쓰이지 않았고, 처음 보는 동화같은 설경에 젖어 들었다. 만져도 실감이 안 되는 자연의 조화를 글로 담고 싶다고 그때 생각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들과는 색이 다른 꼬맹이들이 등원하는 모습이 너울너울하다.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오거나 형제의 손을 끌고 오거나, 엄마가 유모차에 어린 동생을 태우면 본인은 앙증맞은 가방을 메고 자기가 유모차를 끄는 듯 유모차에 손을 얹고 오는 아이도 있다. 출근하는 엄마 아빠들은 주로 차를 타고 와서 차 안에서 아이와 인사를 한다. 차를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 쳐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아이는 엄마 아빠와의 헤어짐의 여운을 오래 갖는다.


할머니와 함께 등원하며 긴 거리를 느릿느릿 걸어 할머니의 애를 태우는 아이도 있다. 기어코 아이를 향해 화를 내는 할머니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마주한다. 가기 싫은 속내를 걷지 않는 것으로 반항하며 단청 부리는 아이도 있다. 빙 돌다가 멈췄다가 할아버지 걸음보다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횡단보도 보행 신호의 남은 숫자가 0이 될 때까지 시간을 꼭 맞춰 건넌다. 조바심을 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나이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우리 말이나, 두 번째 아이라는 다른 나라에서의 말대로, 동갑내기의 말싸움 혹은 기싸움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키 큰 꼬마 숙녀의 할머니와의 등원 길,

“안 추워?”

“요즘 날씨 많이 포근해졌다."

"어제부터 그렇지.”

“…… 응.”

할머니와 주고받는 문답이 어느 것이 아이의 말인지 목소리를 듣고도 구분이 불가능하다. 마지막 시큰둥한 짧은 한 음절 답변으로 아이가 화제를 마감한다. 어른스러운 대화다. 큰 키만큼 마음도 자란 유치원생이다. 할머니는 아이를 어른으로 생각하는 듯 대화를 이으며 걸어간다.


요즘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청춘들이 많다. 우리 아이들도 장래의 계획이나 사귀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앞에서 말을 한 적이 없고, 이미 내가 결혼했던 나이를 넘어섰다. 내가 접하는 글의 절반은 행복한 신혼과 육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고 나머지는 힘겨운 인생의 고비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사투를 벌이는 글이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의 문제는 이미 아니다. 삶의 양상도 목적도 달라진 세대에게 가치의 문제가 남은 것일까.


아주 가끔은 고단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에 시선이 가기도 하고, 가끔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반항을 표현하며 할머니 할아버지의 애를 태우는 꼬마들에게 시선이 간다. 어른스러운 꼬마도 마음에 담고, 동생이 실린 유모차에 손을 얹은 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어디에 눈을 돌려도 모두 아름다운 풍경인데, 아름답게만 바라볼 수 없는 세상이 비정하게 느껴진다. 자식을 셋, 넷씩 거뜬히 키워 낸 ‘할마’, ‘할빠’(엄마, 아빠의 역할을 대신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한 교육 포럼이 많아졌다고 들었다. 전문가를 비전문가로 만드는 세상이다.


어설픈 초보가 된 전문가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간주 되는 세상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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