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두산>을 보고(스포 있음)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너는 가서 아버지 하라.”
탄광 7번 갱도, 라-24로 가는 길에서 혼자서 핵탄두를 가져가기로 결심한 후에 덤덤하게, 하지만 비장함과 쓸쓸함을 바탕에 깔고 얘기하는, 영화 속 이병헌(리준평)의 대사다. 이병헌의 연기는 이런 묵직한 대사도 어울리지만, 감옥에 갇힌 그를 찾아 하정우(조인창 대위)가 이끄는 대원들이 들이닥쳤을 때,
"거기 아닌디", "애기들이 왔네."
이런 대사들도 그의 영화적 표현력을 극대화시킨다고 생각한다.
마치 내 고향의 앞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름만으로도 가슴 뭉클한 백두산. 화산 폭발의 거대한 화력을 한쪽에 구멍을 뚫어 김을 빼서 잠잠하게 하고자 하는 작전이 시작된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영화를 보는 사람이 많았다. 딱히 송년의 의미를 가지고서 보러 간 것은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일 년에 몇 번 영화를 보는 날이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을 뿐이다. 송년의 의미로 선택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는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인기가 없는 건지, 사람들은 아마 다른 영화를 선택했나 보다. 빈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한 달가량 벼르던 영화 관람이었고 영화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재미있었다.
영화를 보고 영화평을 써볼 생각이었다. 평소 서평을 쓰려고 메모하는 습관대로, 메모를 해야 했지만, 캄캄한 영화관에서 휴대폰 불빛을 반짝거릴 수도, 볼펜으로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을 수도 없었다. 나의 오감과 기억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초 집중해서 영화를 봤다, 그리고 애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든 영화였다.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요즘같이 환태평양 조산대의 지각 활동이 활발하고, 그 여파로 지진이 빈번히 일어나는 시점에서는, 늘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백두산 화산 폭발로 인해 발해가 일순간에 그 자취가 사라져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역사학자들이 가설의 하나로 얘기할 정도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은 이야기만으로 충분한 공포다. 그 화산 폭발이 영화의 대주제다.
공포를 다루는 방식이, 공포를 정면으로 들여다보면 지나치게 암울해질 것 같고, 비껴가면 주제와 논점을 흐리기 때문에 적정선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생각이다. 영화는 공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무게를 비껴가기 위한 수단으로 조 대위가 이끄는 다소 흐트러진 부대원들을 선택한 것 같다. 이들의 빈 구석을 통해서 규격화된 완벽한 작전은 이미 힘들다는 것과, 소소한 영화적 재미의 요소를 보여주자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이들을 통한 재미는 별로였다. 남북의 흥망을 좌우하는 큰 작전에 임하는 전혀 긴장감 없는 이들의 튀는 행동은 잠깐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팀을 이끄는 리더 조 대위는 또 어떤가. 그 또한 대원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허술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장점으로 부여한 것이 대원을 가족처럼 대하는 진정성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람과 가족. 부하를 대하는 모습과 두고 온 부인을 향해 드러나는 그의 태도에서의 인간다움이 북한의 리준평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작전에 성공할 수 있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될 거라고. 이 영화에서 한반도의 운명보다는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개인과 개인이 이룬 가족부터, 사회를 이루는 가족, 국가를 구성하는 가족, 나아가 민족을 결속하게 하는 가족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서 가족끼리의 연대가 결국 영화적 마무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정우는 허술함으로 시작했지만 허허실실인 인물이다.
어쩔 수 없이 백두산의 영화평은 전문가들의 접근과는 다르게 접근하게 되었다. 전문가들이 영화를 관람하는 포인트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관람하는 포인트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 또 국가적, 세계적 위기를 다룬 재난 영화, 감독의 전작, 할리우드 스타일과의 영화적 장치를 비교할 만큼 식견이 높지도 않기 때문에. 영화적 기법, CG 처리, 사운드, 촬영에서의 매끄러움, 전후 상관관계, 인물과 사건의 개연성과 사실성 등 그들이 비판하는 요소는 고개를 갸웃하는 부분도 있지만,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백두산을 백두산으로만 보았다. 그리고 충분히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전도연의 짧은 등장은 아쉽다. 그녀의 연기를 길게 볼 수 있었다면 영화적 관점이 비껴갔을까. 배수지의 쿨한 신부의 모습은 다른 면에서 아쉽다. 다만, 리준평의 딸 순옥과 최지영이라는 인물이 닮은 것 같아, 그것도 작은 배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 국적의 한국인 학자, 강봉래. 그의 시각이 모든 검은 머리 외국인의 시각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지막 선택은 반갑다. 간간이 나오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입장은 알고 있었지만 알고 맞는 매가 더 두렵고 아픈 것처럼, 두렵고 아프다. 그들이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만을 한다는 사실과 언제든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들의 밥상에 오르는 상찬으로서의 가치일 뿐이라는 것도. 그런 시각을 작지만 깨알같이 담은 감독의 국가의식도 칭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