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의 재미를 찾아드립니다

<소설처럼>, 다니엘 페나크, 이정임 옮김

by 바람

책장을 폈다. 첫 줄부터 거부감이 온다. 하필 내용도 거부감에 관한 것이다. 묘한 일치라고 생각하며 덮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가봐야 할지.

“‘읽다’라는 동사에는 명령형이 먹혀들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읽다’는 명령형으로 쓰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읽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면서 읽기를 시키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말이다. 기꺼이 선택하고 읽는 것도 이렇다.


책 제목을 보고 막연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선택한 내 기대에 대한 책의 배신이다. 아니다, 소설이라는 말만 나오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무조건 덤비는 과정에서의 나의 실수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앞의 몇 장을 읽어 내려가는 중에도 처음의 기대대로 책의 방향이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이미 출간되어 읽는 책의 방향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라니. 다시 생각해도 우습다. 책의 내용은 독서, 읽기에 관한 지침서다.


저자의 이력답게 글의 내용 중에서 상당 부분이 나의 교단에서의 국어 교육의 이력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묘하게 동질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는 어떻게 교육을 시켰다고? 아마도 이 글에 쓰인 실수를 다 해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랬다면 제목만으로 큰 기대를 가졌던, 그리고 이내 실망했던 내게 그나마 위로가 될 것 같다. 어떤 경험이든 실패를 하고난 후, 진정한 깨달음 뒤에 성취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것이 교육자로서의 독서 교육에 관한 저자의 경험을 바탕에 둔 책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내 마음대로 합리화한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독서토론 모임에 참여한다. 대부분 책을 읽고 오지만 막상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말이 없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 그들의 말은 내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내가 잘 읽은 것인지, …… 등등의 두려움 때문에 우선 입을 닫는다. 책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나의 짐작과는 다르개 분석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해 말이 없는 이유는, 첫째, 읽은 즐거움을 자신만의 느낌으로 간직하고자. 둘째, 겸허함 때문에, 내적 지각을 통해서 나오는 인생을 바꿀만한, 고통스러울 정도의 고독한 깨달음 때문에. 셋째, 책을 읽고 난 후의 충격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책이 세상의 많은 문제를 지적하고 인간의 잘못을 지적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책을 읽은 사람도 세상을 방관할 수밖에 없다는 충격으로 침묵하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책을 읽은 결과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방향의 정리이고 동의한다. 부정적인 방향에서의 정리도 있다. 책은 단지 소통의 도구일 뿐이고, 덜떨어진 위인에게 내숭형 숙녀를 낚는 빌미로서의 소통일 뿐이라고. 책을 자신의 지적 욕구의 발산 혹은 자랑질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냉정한 경고다.


부정적인 소통으로서의 독서가 아닌 똑똑한 독서는 무엇인가? 책이란, 소설이란, 하나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 소설처럼 읽기란,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며 몇 단계의 필터를 거쳐도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면, 작가의 문체와 문제의식과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재미있게 읽고 읽어줄 것, 읽기 행위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독자나 청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 것. 즉 무상성이 필수라고 여러번 강조하며 말한다.



그렇다면 언제 읽어야 할까? 우선 책을 읽을 시간을 훔쳐야 한다.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많은 의무의 시간들 가운데 읽기 시간은 따로 없기 때문에, 그것들 중에서 일정 부분을 훔칠 것. 그래야 독서의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른 시간을 훔쳐와서까지 읽기에 독자의 권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책을 읽지 않을 권리,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보바리슴을 누릴 권리,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군데군데 읽을 권리, 소리 내어 읽을 권리, 읽고 아무 말 안 할 권리.



독자의 권리를 이야기하며 드는 다양한 사례가 압권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디킨스와 카프카와, 달린 토머스와 니콜라이 고골과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가르시아 마르께스와 플로베르와 ……. 그야말로 문학가의 향연이다. 이 많은 책들을, 제시된 이 사례를 모두 기억하고 읽는다면, 읽기가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 풍성하지 않으면 또 어떤가, 저 많은 독자의 권리 중 하나씩 꺼내어 사용해도 되는 것을.



시인 조르주 페로스의 전기에서 시인이 가르쳤던 대학의 여학생이 쓴 글을 인용한 부분은 인상적이고 충격적이다. 읽어주는 것의 감동이 이처럼 대단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맑고 우렁차면서도, 조금은 고즈넉하게 들리는 교수님 목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어요. 원형 강의실, 극장, 아니 마르스 광장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쩌렁쩌렁하면서도, 말꼬리 하나 허투루 얼버무리는 법 없이 또렷이 울리는 명확한 음성이었어요. 교수님은 분위기를 압도해가며 우리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재주를 타고나신 분 같았어요. …… 교수님이 낭독하시는 동안, 우리는 줄곧 아를르캥과 실비아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우리가 교수님의 실험극을 보조하는 조수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지요. …… 학년 말 교수님의 강의가 다 끝나고 난 뒤 내게 남은 것을 하나하나 헤아려보았어요. 셰익스피어, 프루스트, 카프카, 비알라트, 스트린드베리, 키르케고르, 몰리에르, 베케트, 마리보, 발레리, 위스망스, 릴케, 바타유, 그라크, 아르들레, 세르반테스, 라클로, 시오랑, 체호프, 앙리 토마, 뷔토르 …… 지난 10년 동안 그때 들은 작가의 10분의 1도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아요!


인용문을 통해 책 읽기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학생과 교수가 함께 책 속에 빠져드는 기쁨, 그 기쁨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는 집요한 갈망. 모든 교육이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했을 때 놓쳤던 아쉬움이 있다. 다시 찾아 넵스키 대로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만끽해보고 싶다. 순회 강연은 아니라도 순회 독서는 멋지지 않을까.


책을 읽은 마지막 감상은 “모든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는 책의 문장으로 대신하고 싶다. 애청하던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와 장면이 오버랩된다.(심지어 머릿속에서는 음악도 흘러나왔다. 그리고 드라마 속에 이미 내가 들어가 있었다.) 그 대사를 만난 순간 정말 책에 빠진 것같은 보바리슴을 경험한다, 정말 책 읽기의 특별한 비밀을 만난 듯한 느낌과 함께. 그리고... 여학생의 편지는 여운이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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