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무한 책임의 연대기

<사실들>, <검은 개>, <숨겨진 삶>

by 바람

1 가족, 숨기고 싶은 은밀함


글쓰기 모임에서 자서전을 쓴 적이 있다. 삶의 한 부분을 회고해 보자고 했다. 스스로 자신을 말하기 부끄러우니 그래도 객관성을 가져보자는 취지로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 나’를 말하자고 했다. 자서전이 사실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과제가 어려웠다. 한 점 의혹이 없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사실의 요건을 갖춘 나를 이야기한다는 자체로도 광장 한가운데 던져진 느낌이었다. 무수히 많은 눈이 나를 향하고 그것이 사실인지 심사하고 노려보는 것 같았다. 특정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따라 주변의 정황이 그려졌다. 그것을 최대한 포장했다. 불편한 상황은 두루뭉술 썼다. 객관성을 유지하고 싶어 감정을 담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감추고 지우고 덮고 싼 글. 그 과거는 어땠다고? 급하게 마무리했다. 최대한 윤리적으로,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추지 못했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게 솔직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 나’를 쓰는 것이었다. 시점을 바꾸니 대놓고 윤색해도 되는 과제였다.

부제 <한 소설가의 자서전>(A Novelist’s Autobiography)의 제목은 《사실들》(The Facts)이다. 글을 읽는 내내 과연 자신의 이야기를 사실(fact)대로 쓸 수 있을까. 사실은 다양한 옷을 입는다. 사실이라고 해도 다양한 시각에 따라 상황도 사건도 바뀌는데. 똑같은 현장을 여럿이 목격해도 진술이 다르다. 사실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자체 왜곡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서전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기억들의 왜곡이다.

저자의 反자아(counterself)인 주커먼은 “조작은 진실로 무의식적인 것인가, 아니면 무의식적인 것처럼 꾸민 것인가”라고 묻는다. 더불어 가장 핍진하게 진실에 입각해서 그려진 삶을 조이와의 결혼과 시련이라고 평가한다. 고난과 시련의 순간에 자신의 바닥이 드러나는 경험은 어느 것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는 것일까. 주커먼은 조이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부분과 아버지에 대하여도, 어머니에 대하여도 지나치게 간략한 삶의 정리가 아쉽다고 말한다.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의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노출하는 두려움조차 주커먼을 통해 확인받고 이해를 구하는 저자에게 가족의 객관화된 노출은 어렵다. 가족은 지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조이는 그에게 꿈의 여인이 아니던가. 영리한 자기변명과 함께 쓰기로 하고 쓴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왜곡도 자기 자신에 달린 것이고, 아무도 모르지만, 자신만은 알기에. 자서전의 지배적 동기를 ‘윤리적’이라고 말한 것은 양심에 기댄 동기부여이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나름의 기준이다.


진짜 상상적 사건은 사실들에서, 철학적이거나 이상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닌 특정한 것들에서 시작된다네.
내게 이런 특정한 것들은 웃음, 목소리, 심장박동, 냄새, 손의 움직임 등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기억에 조심스럽다. 기억은 웃음, 목소리, 심장박동, 냄새, 손의 움직임이고, 그런 것들에 의해 상상이 시작되고, 상상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상상이 된 사실과 상상으로 낳은 가족은 더 경계한다.


자신의 동기를 숨기는 사람(작품에서는 ‘작가’)이 자기 행동과 생각을 제시하는 것은 상황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함인가, 아니면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하는 식으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함인가.


결국, 저자인 주커먼의 고백은 비판은 결과적으로 자기 검열이다. 가족은 숨길 수밖에 없는, 끝까지 보호해야 할 삶의 은밀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2 가족은 희망이다


2차 세계대전이 지나간 1946년, 인간의 타락이 교묘하게 숨어있던 이 시기에 행복한 출발을 꿈꾸며 자유를 시험하고 싶은 공산주의자, 준과 버나드의 앞날은 꽃길처럼 보이고 세상은 평화로웠다고 이야기한다. 수천만 명이 죽었고 땅은 폐허가 되었으며 강제수용소의 참상은 뉴스에서 들리는 공허한 외침이다. 신혼여행길, 준은 ‘검은 개’를 통해 악을 체험하고 신의 존재를 믿게 되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고립된다. 준의 갑작스러워 보이는 변화는 악의 실체를 말하고자 하는 발버둥이다. 준은 검은 개와 맞닥뜨린 사건을 얘기하며 악이 발현되어 어떻게 세상에 뿌리내리고 사람들에게 침투하는지를 자신의 삶을 통해 얘기해줄 뿐이다. 작가 김원일은 구원이나 긍정을 바탕으로 한 화해보다 어둠, 삶의 어려움이 주는 쓸쓸함과 고통에 흐느끼는 절망을 사랑해왔다고 말한다. 바로 준의 마음이다.

인간에게 극한의 공포와 악이 덮칠 때 가장 큰 고통을 받는 대상은 순수하고 어린 영혼들이다. 준이 만난 공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악의 발현 양상을 보여준다. 준의 행보는 나약한 개인으로서는 사실상 절망의 행보지만, 그녀는 절망을 사랑했고 어둠과 죽음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고자 노력한다. 사진 속 젊은 시절의 준의 순수한 모습은 악과 맞서 홀로 이겨내는 과정을 거치며 완고한 미소와 단호한 자기 견해로, 미래에 대한 과학적 낙관주의로 그녀의 영혼을 재탄생시킨다.


이 개들은 타락한 상상력이, 어떤 사회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변태적인 정신이 만들어낸 산물이었어. 내가 말하는 악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고 있지. 그것은 개인의 내면에, 사적인 생활 속에, 가정에 뿌리를 내리고, 그 결과 가장 고통받는 건 아이들이야. 그다음엔 조건이 적당할 때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기에 끔찍한 잔혹성이, 생명을 억압하는 사악함이 터져 나오고 모두 자기 안에 있는 증오의 깊이에 놀라는 거야. 그러면 그것은 다시 가라앉아 때를 기다리지.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야.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 ‘규칙에 복종하는 평범한 독일인’인 아이히만이 수십만을 학살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묻는다. 악은 우리 주변 평범한 모습으로 숨어있다 어느 순간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악을 마주한 순간을 개인의 경험의 차원으로 좁히면 우리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평범성의 이름을 가장한 악의 실체를 준과 같이 모두가 극도의 공포를 통해서 발견할 필요는 없다. 방법을 달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준은 모두가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악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룬 단순한 사회를 잘 건사한다면,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수백만 명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준의 마지막 말은, 우리에게 가족의 연대와 사회의 연대를 통한 희망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준이 갖는 희망을 단단히 지지해주는 것은 가족이다. 남편 버나드, 딸 제니, 그리고 사위 제러미는 준의 희망의 보루다. 악의 실체를 끝까지 규명해야 하는 준은 남편과의 화목한 앞날을 거부한다. 자신의 외로운 길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 누군가는 절망을 사랑해야 하고 그것이 세상의 질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준은 공포를 마주하고 그렇게 죽음 앞으로 다가가며 그 용기는 묵묵히 지켜주는 가족에게서 나온다.

살아가며 검은 개의 진화를 목격한다. 더 은밀하고 비틀린 양상으로 나타나는 악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솟구치는 분노는 테러로, 방화로, 살인으로 나타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룬 사회를 잘 건사해 볼까. 준의 마지막 희망대로 가족의 연대에 기대어 볼까. 1946년 준의 체험은 현재 우리에게도 진행형이다. 어린아이와 여성,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 또한 아직 진행형이다.



3 가족의 사보타주를 완성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숨겨진 삶이 있다. 아니 눈에 띄지 않는 삶이 있다. 하나의 기억을 잡고 따라가면 그 기억의 끝에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는 다른 기억이 있다. 도무지 보여주지 않던 기억은 다른 단서를 만나 또 한 귀퉁이를 슬쩍 보여준다. 희미한 흔적은 쉽게 만나기 어렵다. 그런 기억의 파편들, 흩어진 기억의 주변에 가족의 삶이 있다.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기억들. 그 조각들 사이의 숨겨진 삶.

파콤 제브뢰즈와 베르강스였던 셀레스트의 아들이며 피에르 에프렘인 피에르 제브뢰즈, 이름만큼 복잡한 그의 삶을 통해 가족의 지난한 역사가 드러난다. 복잡해서 풀 수 없을 것 같은 헝클어진 사연을 안고 피에르는 사빈의 집으로 들어와 아이들의 후견인으로 깊숙이 자리 잡는다.


‘뚜르 드 리앵’(無의 질주), 저는 완성을 지향하지 않아요. 살아남는 일 자체가 저에겐 이미 아주 절묘한 노동이거든요.


피에르가 삶은 ‘우연한 판결에 따라 선택’된 것이다. 우르푀빌에서의 그의 삶은 사빈과, 그녀의 딸 마리와 큰아들 앙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시간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그에게 공간은 무의미하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그렇게 그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정현종의 <방문객>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한 사람의 일생이 온다고 말한다.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라고. 방문객 피에르는 우르푀빌의 가족들의 미래를 요동치게 만든다. ‘한 발을 무덤에 두고 살던’ 마리와, ‘얼어붙은 기억 속에서 고요한 부동의 상태로 휴면 중’인 사빈의 삶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리는 성장하며 으깨져진 다리로 인해 분노와 충동질로 삶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녀의 분노를 잠재우게 된 사건은 피에르의 실종이다. 피에르가 남긴 젤리의 문장을 통해 마리는 어린 시절 친구인 조에와 나이가 동갑이고 비슷한 괴벽을 지닌, 젤리라는 이름의 소녀를 등장시킨 상상 속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분노는 조절되고 상처는 치유된다. 책이 되고 싶던 소녀는 책을 통해 재탄생한다. 피에르에게 사빈, 마리와의 만남은 ‘숨겨진 비극이 보이는 것과 마찰을 일으키다 포옹하며 접촉하는 과정에서의 수축과 팽창의 이중의 운동’이다. 사람의 기억이 깨어나는 과정은 빅뱅을 연상시킨다. 퍼즐을 맞추듯 곳곳에 피에르는 내면의 삶, 눈에 띄지 않는 삶을 묻었고, 사빈과 마리는 피에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꺼낸다. 방문객과 우르푀빌의 가족은 서로를 깨운다.

피에르는 엄마 셀레스트와 아버지 파콤, 그리고 파콤의 숨겨진 사람, 에프렘의 사보타주를 안고 태어났다. 아버지 파콤이 독일군에 의해 유배된 후, 엄마와 독일군 요한과의 사랑을 통해 탄생한 젤리까지, 피에르에게 삶은 도저히 풀 수 없는 미궁이다. 그 모든 것을 안고 피에르는 무의미한 공간에서의 쉼을 시작한다. 피에르 가족의 숨겨진 삶은 자신의 사연과 닮아 있는 사빈 가족을 만나며 과거와 마주할 용기를 얻고 변화를 시도한다. 피에르는 우르푀빌의 삶을 통해 가족의 사랑과 속임수의 사보타주를 완성한다. 1976년 9월 29일의 공연, 전통 가치들의 붕괴이자 지성에 대한 모독이었던 우스꽝스러운 유희의 연극 ‘가뷔조뫼.’ 연극은 가족의 의식을 해체하고 단순한 상황으로 그들의 일상을 흔들고 제멋대로 정리한다. 의식 저 밑바닥에 가려져 있던 숨겨진 삶이 발견되는 순간 연극의 의미는 강렬해진다. 자신을 타자화한 채, 연극에 참여한 가족들(배우들) 모두는 해체되고 새롭게 출발한다.

인생의 절정은 서로 절묘하게 어긋나 있다. 절묘한 어긋남의 어느 귀퉁이에서 참여한 사람들만큼의 다양한 색채로 무대가 실현된다. 피에르를 향한 샤를람의 조롱은 피에르에게는 자신을 더 쉽사리 놓아버리기 위한 동기를 부여할 뿐이다. 놓아버린 여정의 끝에서 피에르는 자신을 되찾는다. ‘소예수’라는 그의 별명은 감당할 수 없는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사빈 가족을 해체하고 구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정면대결을 통해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한 것에서 벗어난다. 또 다른 상처 입은 가족의 사보타주를 완성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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