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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Feb 01. 2022

폭력적 세상에서 느긋해지는 방법

[리뷰] 영화 <안경>

영화 <안경> 스틸컷


포털을 검색하면 오전 오후로 대문의 뉴스가 바뀐다. 제목은 선정적이고 댓글은 폭력적이고 내용은 충격적이다. 그런 분위기에 이유 없이 휩쓸리게 되고 화가 난다. 보도의 주체가 바라는 대로 무방비로 상황에 직면해야만 한다. 벗어날 구석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사람들의 사고와 공격적 태도가 무섭다.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않고 보지 않을 자유를 요구하고 싶다.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사람을 바로 보고 판단하기 위해, 속아 넘어가지 않고 실수나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안경을 고쳐 쓰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 미세한 먼지까지 깨끗이 닦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지만 혼탁함은 안경의 문제가 아니다. 할 수만 있다면 탁한 세상에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의 간섭도 없이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지내고 싶은 마음이 1년에 한 번씩은 드는 것 같다. 산사에서 진행하는 템플스테이도 관심을 가져 봤고, 노선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버스에 오르고 아무 곳에나 내려 무작정 걷다 돌아오는 방법도 생각했다.


템플스테이는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물론 혼자서가 최종 목표지만 아직은 어려우니 둘이서라도 시도해볼까 싶다. 간섭하지 않는 누군가, 남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곁에 있어줄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면. 자유로움을 갈망하지만 안타깝게도 홀로는 불안하다. 낯선 곳에 혼자 놓인 느낌만으로 지층이 흔들리고 걸음은 흐트러지며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진다. 내가 나로부터 분리되는 느낌. 사정이 이러니 버스를 타고 훌쩍 떠나는 것도 아직은 무리다.


나와는 다르게 영화 <안경>의 주인공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는 바닷가 마을로 용감하게 떠난다. 영화의 제목과 영화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울릴 듯 낯설었지만. 타에코는 내겐 불가능한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감행한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찾은 곳. 한적한 공항에서 내린 그녀는 난해한 지도를 가지고도 단번에 민박집 '하마다'를 찾았고 민박집주인 유지(미스이시 켄) 씨로부터 "여기에 있을 재능"이 있다는 칭찬도 받는다.


영화는 일본의 요론섬을 배경으로 한다. 아름다운 자연이 영화를 보는 내내 펼쳐진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가 넘치는 영화시장에서 아주 드물게 맑고 잔잔하고 덤덤하고 담백하다. 그녀가 먼 곳으로 떠나온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기댄다. 영화에서는 친절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소개되는 음식들도 가지런하다. 사쿠라 씨의 팥, 얼음, 시럽만 넣은 빙수와 유지 씨의 단출한 도시락, 매일 아침 식단에 오르는 어떤 음식과도 어울리는 그 해에 담갔다는 매실장아찌까지 담백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낯선 곳에 막 도착한 이방인인 그녀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무심함과 친절함의 적절한 경계에서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사쿠라(모타이 마사코)씨는 봄이 되면 이 섬을 찾아오고 한 철만 바닷가에 머물다가 홀연히 떠나는 사람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누군가의 인생을 바꾼 빙수를 만들어 팔고 아침이면 바닷가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메르시) 체조를 가르치기도 한다. 움직임은 조용하지만 시선은 거침없고 정확하다. 낯선 이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눈빛인데 날카롭지 않고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이러니다.


아침이면 타에코의 잠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리다 아침 인사를 하는 사쿠라 씨는 타에코의 아침을 조용히 깨운다. 타에코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는 모습과 그런 그녀를 안경을 찾아 쓰고 바라보는 타에코, 그녀는 다정한 어머니 같기도 하고 능청스럽게 보이기도 하다. 거기에 사쿠라 씨가 진행하는 체조를 사색에 좋다며 권하는 유지 씨, 숙소에 묵지도 않으면서 매번 식사를 함께하는 하루나 씨까지, 타에코는 왠지 그 모두가 불편하다.  


관광할 것이 없는 곳에서 만난 이상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타에코는 다른 숙소를 찾아 단호하게 떠났지만 그곳은 농경체험을 해야 하는 곳, 내키는 대로 조용히 있고 싶은 그녀와는 더 맞지 않는 곳이었다.


다시 유지 씨의 민박으로 돌아온 타에코는 이제는 마음을 조금씩 연다. 그들과의 일상을 제법 잘 지내기도 한다. 바닷가 마을에 있을 재능이 발현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독특한 일상에 자연스럽게 젖어든다. 사색을 하는 방법을 묻고 한사코 거부하던 빙수의 맛도 알아간다.


영화를 잠깐만 봐도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전작 <카모메 식당>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소환된다. 느리게 흐르는 일상, 바닷가, 의자, 뜨개질, 맥주, 빙수 등 어느 것을 붙잡고 있어도 긴 시간을 멍 때림이 가능하다. 꽉 찬 대화나 화려한 볼거리가 없어도 영상은 편안하고 깊이 몰입할 수 있다.


영화의 매력은 인물 간 갈등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다. 엉뚱하지만 신중하고 기이하지만 진지하다. 순한 매력이 돋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 중 누구도 거슬리지 않는다. 어설픈 말과 행동은 상대를 무장해제하게 만들고 혼잣말 같은 부드러운 대화는 보는 이의 마음을 오래 잡아 끈다.


매실은 그날의 화를 면해 준다.
여행은 문득 시작하지만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 거죠.
달빛은 어느 길에나 쏟아진다.
차분히 기다릴 뿐입니다, 흘러가 버리는 것을.


영화의 말미, 타에코의 안경이 바람 때문에 차창 밖으로 날아간다. 잠시 당황하지만 이내 안경을 포기한 그녀는 막힌 것 없는 눈으로 세상을 맞이할 자세가 되어 있는 듯하다. '조급해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 팥을 삶을 때의 비법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치환되는 순간이다.


사망, 갑질, 파업, 허위매물, 혼란, 진영 싸움, 저격, 집단감염. 오늘의 포털 메인을 장식하는 기사의 제목에 보이는 단어들이다. 곧 이 세상이 사라질 듯한 위기감이 느껴진다. 날마다 더 센 말을 생각해 내고 더 강한 타격을 주려고 애쓰는 모양새다.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잠시라도 놓이는 방법을 영화는 알려주는 듯하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세상이라서 더 매력적인 평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하루쯤 휴대전화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이 들 때, '2분 정도 더 참고 가면 오른쪽입니다'라고 누군가 메모를 건넬 수 있을 테니.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 꾸벅거리는 봄의 바다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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