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을 위한 노력이 함께한다면... 김훈 소설 <하얼빈>을 읽고
나의 시체를 하얼빈에 묻으라.
안중근의 유언이 퍼지며 한인사회는 흥분했고 일본은 긴장했다. 안중근은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이하 이토)를 죽인 뜻이 명확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태도가 주는 파장을 일본은 심각하게 걱정했고 결국 시신마저 유족에게 내주지 않았다. 그는 감옥 구내 묘지 어딘가에 묻혔으나 2023년이 된 지금도 우리는 그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모든 한국인이 이토를 증오하고 있다고 말한 우덕순의 말과 안중근이 이토를 쏜 이유는 다르지만 같았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라는 세 단어는 다른 많은 말들을 흔들어 깨워서 시대의 악과 맞서는 힘의 대열을 이루었'고, 남루한 단어들이 갖는 연대는 거창한 구호가 없이도 우덕순과 안중근을 눈빛으로 하나 되게 만들었다.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듯이 죽였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안중근은 이토를 쏜 이유를 법정에서 진술한다. 정치성이 드러나는 그의 말은 일본이 만들고자 하는 명분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일본은 그의 논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재판과정에 공을 들였지만 순조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빠르게 정리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또한 안중근의 죽음 이후까지 치밀하게 통제한다. 1910년 국권을 침탈한 일본의 교활한 태도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며칠 전 아침방송에서 평화의 소녀상 관련 이야기가 나왔다. 2022년 11월 25일, 아르헨티나 한인회와 아르헨티나의 5월 할머니회(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희생당한 이들의 유가족들)의 주도로 기억의 박물관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는 소식이었다.(2022년 12월 23일, 뉴스공장)
방송에서는 무산된 이유를 일본 대사가 '평화의 소녀상 설치가 일본에 대한 모독, 공격이'라고 하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결정적인 것은 기시다 총리가 G20에서 소녀상 건립이 양국 간의 갈등이 될 것이며 만약에 세우면 IMF에 투표권을 행사해서 투자 철회 등의 협박이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기억의 박물관은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을 해 놓은 상태인데, 유네스코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고 덧붙였다.
현재 일본의 극우는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 자체를 부정하거나 지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인접한 우리나라만이 일본의 강제 징용이나 성노예 문제의 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해 당사자인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그 문제에 대해 더는 일본에게 사과도, 배상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이 어려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은 흔들림 없이 정책적으로 일관된 입장을 보여주는 반면, 우리의 대응방식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고 요동친다. 이러한 시점에서 김훈의 소설 <하얼빈>은 나의 민족적 정체성을 깊이 느끼게 한 것 같다. 안중근의 깊은 눈, 서늘한 심장, 냉철한 분노가 지금 이 시대에 더 반갑고 감사했다.
<하얼빈>은 무거운 주제와 역사적인 인물의 개인적 투쟁의 역사가 민족사에 끼친 엄청난 사건을 얘기하면서도 글이 튕겨 나오지 않고 쉽게 읽혔다. 책을 읽으며, 역사는 사람과 기억과 기록의 만남이며, 서로 잘 어우러질 때 바람직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또한 역사의 증거이며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도장의 힘은 작동되고 있었으나, 조약 체결을 공포한 후 분노하는 조선 민심의 폭발을 이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 비통한 글을 남기고 잇달아 자결했다. 그들을 독약을 마셨고 물에 뛰어들었다. 조선 황제는 자살한 신하들에게 표창을 내려서 충절을 기렸다. 오백 년을 지탱해온 나라의 관리와 식자 몇이 치욕을 못 견디어 자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부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일파가 흔들리는 만파가 일어선다. 산촌에서 고함치면 어촌에서 화답한다.
비록 친일 관료들을 앞세워 도장 하나로 빼앗긴 나라였지만, 민초들의 분노,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을 일본은 더욱 두려워했으며, 그러한 저항 운동의 명맥이 이어져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작가의 말처럼 안중근의 생애는 짧고 강렬하다. 영웅임이 틀림없지만 영웅의 모습을 거두고 나면 뜨겁고 혼란스러웠을 청춘이, 아까운 한 사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가는 그 인물의 짧은 시간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그렇게 해서 '짐승을 쏘기에 아까운' 그의 솜씨로 적의 심장을 관통하고 흔드는 것을 작가는 예리하게 포착하고 전달한다.
일찌감치 민중들에게 그의 행동은 국가를 위한 영웅적 의거이며 독립 투쟁이었으나 종교적인 판단은 달랐다. 재판 당시에 안중근에게 내려졌던 그릇된 종교적 판단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정당방위'로,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했다고 김수환 추기경은 바로잡는다. 짧은 생애를 통해 보여주었던 안중근의 깊은 신심을 생각한다면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던 어른들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림으로써 여러 가지 과오를 범한 데 대해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연대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합니다.'(1993.8.21 안중근 의사 추모미사 중 김수환 추기경 강론, 후기 중)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편이다. 핍박받고, 정치 경제적 이익 때문에 불의에 눈 감는 정부 대신, 억압당한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록된 역사는 핍박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덕순과 안중근의 행위가 그러했고 이름 없이 희생한 많은 독립지사들의 행동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녀상 건립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의 한국 인민을 죽이고' 능욕한 그들의 범법은 잊히지 말아야 한다. 소녀상 하나가 가지는 기억의 힘, 비석에 새겨진 작은 기록의 힘을 아직은 가늠할 수 없지만,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막으려 하는 일본 정부의 끈질긴 훼방과 그들의 두려움을 생각한다면, 소녀상 건립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과 다르지 않으며 청년 안중근의 결단만큼이나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중근의 여행은 존재를 위한 여행이었으며 거사를 위한 여행이었고 죽음을 향한 여행이었다. 어떤 여행이었건 그의 여행은 실패도 끝도 아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에 따르면,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알리기 위한 우리의 노력, 현재 해외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평화비는 9개국에 35개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