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현 글, 유희 그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매년 2월과 8월은 각종 독서 모임의 회원모집 성수기다. 지역 도서관별로 독서 모임이 개설되고 문화센터나 주민센터에서 진행하는 모임도 공고가 뜬다. 이전에 참여했던 모임에서도 함께하자는 연락이 온다. 관심만 있으면 선택의 폭은 넓다. 어디가 좋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 시간이다.
공고를 확인하며 마음이 바빠진다. 대개 주 1회 진행되기 때문에 일정을 고려하여 비워둘 수 있는 날을 정한다. 날짜가 맞는 모임을 간추리면 다음으로 독서 목록을 점검한다. 깊지는 않아도 나름 즐겨 읽는 분야가 있다. 두 말이 필요 없는 편향된 독서를 하지만, 독서 모임을 통해서 편식을 극복하자고 생각한다.
회원 모집 기준도 살펴본다. 연령층을 한정하는 모임은 무조건 피한다. 성인으로 두루 포괄하면서도 직장인도 참여할 수 있는 저녁 모임이 좋다. 다양한 연령층과 직업군을 만날 수 있어 같은 책을 읽어도 대화의 내용이 풍성하다. 다만, 고정 멤버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모임은 일부러 피한다. 낯을 가리면서도 새로운 얼굴이 좋다. 모임의 기본이 지켜질 수 있고, 무엇보다 저들끼리 끈끈한 것은 불편하다.
신중하게 선택했어도 결과적으론 복불복이란 것이 함정이긴 하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근면하고 성실한 회원이 된다. 책도 꼼꼼히 읽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고 독서를 향한 열정이 사그라들 때 스스로를 일깨우는 효율성 높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이창현 글, 유희 그림)에서도 독서 모임이 나온다. '책은 넘쳐나지만 모두가 책을 읽는 것은 아닌, 성인 10명 중 4명은 책을 전혀 읽지 않는(출판사 서평)' 현실에서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희귀한 독서 마니아들의 독서 습관과 분위기를 만화 특유의 감각으로 유쾌하게 전달하고 있다.
'독서'를 소재로 한 화제의 웹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편이 2018년 사계절만화가열전 열세 번째 책으로 탄생되었으며, 그 2편이 5년 만에 출간됐다.
이미 독서가라면 자신의 취향을 점검할 수 있다. 비독서가여도 무리 없이 빠져들 수 있다. 어쩌면 책이 좋아질지도. 사실 '독서' 중독은 아닌 '만화' 중독자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다.
제목만으로 '독서 중독자'의 부류에 적당히 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쉽지 않다. 나아가 당당히 나를 감추어도 될 것 같은 '익명'에 이끌렸는데, 읽다 보니 책의 인물들은 서로 촘촘하게 엮여 있다. 서로 끈끈하기도 하고. 익명 맞아?
1편에서 보여준 회원모집의 원칙, '인문주의는 제국주의와 다르며 적이란 것을 알지 못하고 하인을 원하지 않는다. 이 정선된 영역에 속하고 싶지 않은 자는 그냥 바깥에 있어도 좋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슈테판 츠바이크, <에라스무스 평전>)'는 말은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깊이 새겨야 할 듯하다.
책을 고르는 방법도 독특하고 신선하다. 일기장에나 적을 만한 사소한 내용의 저자 소개가 된 책이나 '저자 소개'보다 '역자 소개'가 긴 책, '저자명'보다 '출판사명'이 크게 인쇄된 책과 '목차로 전체 구성이나 전개 방식을 가늠하기 어려운 책', 원서와 대조해 목차를 변형한 것 등은 배제한다는. 시작은 진지하고 중간은 가벼운 느낌적인 느낌.
푸르스트를 언급하는 것에 대한 경고는 뜨끔하다. 얼마 전 프루스트 읽기 모임에 참여를 제안받은 적이 있다. 한 달에 한 권씩 총 13개월에 걸친 독서 프로젝트라는 말에는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며 거절을 대신했는데, 그 '프루스트'가 이 독서 중독자들의 금기어란다. 프루스트는 독서 중독자들의 그럭저럭 심도 있는 대화의 수준으로도 언급 불가능한 책이라고 한다니. 그나저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은 꼭 읽어봐야겠다.
2편에서는 독서 중독자들의 애정 어린 공간인 도서관과 사서가 등장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을 저마다 얘기하는 장면은 군대 안 가본 자들의 군대 이야기만큼이나 자세하고 인상적이다.
'도서관 우수 회원에게 연체란 없다'거나, '근처에 도서관이 없다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며 이사를 가라'는 말은 중독자가 아니라도 꼭 주지해야 할 사항이다. 특히 아이가 있다면 더더욱 명심할 것.
책은 인간과는 달리, 마음을 짓누르거나 수다를 떨거나 떼어 버리기 어렵지가 않다. 책은 불러내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이 책이나 저 책을 집어 들 수 있다. 책은 넘쳐나지만, 모두가 읽지는 않는다. (…) (35쪽, 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
그밖에도 '주석 무시하기', '완독에 대한 집착 버리기',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기',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밑줄 긋기'나 '메모하기' 등 1권에서의 다양한 독서 스킬과, '독서 중독자들은 베스트셀러에 냉담하다'는 말은 2권에서도 유용하다.
'작가에게는 끝이 있지만 책은 계속 나오는 거니까'라고 말하는 '존 르 카레(1931-2020)'에 대한 독서모임 회원 '사자'의 팬심은, 당장의 베스트셀러보다는 시간을 초월해서 이어지는 작품의 가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책에서와 같이 '독서에 대한 지나친 애정과 집착, 허세'로 모인 독서클럽은 사실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무심한 척 앉아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무수한 책을 가져와서 자신의 지적 성취를 펼쳤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예전 모임의 회원은 지금도 여전하려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당황했고 어설픈 지식을 들키지 않으려 침묵했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그러고 보면 책을 읽는다는 사람치고 독서 행위에 집착과 허세를 빼면 뭐가 남을까 싶기도 하고.
단지 만화로 가볍게 책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만화가 주는 감성과 자잘하고 유쾌한 재미를 즐기면 된다. 독서 모임이라기보다는 사회 부적응자들 같은 인물들의 B급 감성 터지는 썰렁 개그와 좌충우돌의 대환장 파티에 책장이 거침없이 넘어간다.
그런데, 책에 소개되는 책들의 태반은 제목조차 생소하다. 나만 그런가? '독서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춰 준다'는 거 맞나? 의문은 있지만 책을 읽고 즐거웠다면, 지금 당장 다른 책을 찾고 있다면, 독서 중독자들의 독서 리스트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우리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은 한정되어 있으니.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의 종이책 독서율은 2017년 60%에서 2021년 41%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성인의 종합 독서량도 2019년의 8권에서 5권으로 38%나 줄어 성인의 감소율이 가장 컸고, 종이책을 전혀 안 읽는다고 답한 비율도 47.9%에 달했다고 한다. 매년 독서 모임을 찾아 헤매는 입장에서는 실로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최근 들어 무차별 폭력과 살인 등의 범죄가 우리 사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외에도 괴롭힘이나 자살 등의 문제는 이미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문제로 확산된 지 오래다. 사회는 이미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독서 인구가 이렇게 줄어드는 데도 불구하고 독서 모임은 왜 주변에 많은 것일까 생각하니, 살아남기 위해 더 맹렬하고 처절하게 매달리려는 노력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의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도 요즘 우리 사회의 이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직업인이나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수한 폭력과 부조리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이다. 특히나 날마다 벌어지는 재난과 사건 사고의 처리는 꼬리 자르기 식으로 귀결된다. 임시방편과 임기응변이 성행하는 사회, 사회초년생은 가장 자르기 쉬운 꼬리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도 허술하고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다. 사서인 '다크 섹시'와 신분을 위장한 '경찰'이 직업적 강박에서 벗어나 정신의 정화를 위해 독서라는 출구를 택한 것처럼, '고슬링'과 '광인'이 그들의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독서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것처럼, '나'를 지키기 위해 책이 필요한 시기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또 어디쯤 서 있는지를 살피려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읽는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아니면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읽는다. 우리는 뭔가를 읽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한다.(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성급하게 진위를 판별하고 가짜를 거르며 죽음을 논하는 세상에서 오류나 편향성을 극복하는 힘도 책이 가진 내면의 힘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외부의 불안에 동요하지 않고 내면의 힘을 키우는 시간이 필요한 때다. 이를 위해 앞서 언급한 '정선된 영역'의 책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