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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an 04. 202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2020년 1월 1일 인천 문화의 거리를 다녀와서

학교에서 문학창작 동아리를 이끈 적이 있다. 아이들과 문학의 발자취를 찾아 긴 걸음을 걸었다. 길상사에서 백석 시인의 흔적과 그의 사연을 만나고, 국립 중앙박물관장이었던 최순우 선생의 옛집을 거처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 시인인 한용운의 마지막 거처인 심우장까지.

그곳의 툇마루에 앉아 아이들의 시심을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은 그럴듯한 작품을 쓰기도 했고, 생각을 떠올리지 못해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여정만을 정리하기도 했다. 찌는 듯한 여름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앞뒤로 불어와 더위에 지친 마음을 식혀주었다.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던 곳, 요정의 주인 김영한(1916-1999, 법명 길상화)이 건물을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1995년 6월 13일 법정 스님에 의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되었으며, 1997년에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다. 2010년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서 78세로 입적하였고, 길상사의 원전인 대원각을 시주한 고 김영한은 근대 시인 백석의 연인이며, ‘자야’와 동일 인물로 길상사 시주와 더불어 이들의 애절했던 사랑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회자되고 있다.


영화 <뷰티인사이드> 외 촬영지


2020년 1월 1일. 인천 부평의 문화의 거리를 찾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근대문학관 건물이 앞에 서 있다. 백석 시인의 시가 전면 유리에 새겨 있다. 천억의 돈이 “우리 시인님의 시 한 줄만도 못 하”다는, 그 시를 마주한 순간이다.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부분)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사랑하는 여인을 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하필 눈은 푹푹 내리고, 사랑은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없고. 혼자 있을 수밖에 없고, 쓸쓸하니 소주잔을 기울이는 거지. 그리고 생각, 간절한 바람을 상상하는 거야. 사랑하는 여인과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서, 깊은 산골로 가서, 눈이 푹푹 쌓여 아무도 찾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 가서, 오막살이를 지어 살아도 행복할 것 같다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거지.”

“정말 그래?”

“그렇지 않나?, 다른 뭐가 있겠어.”


문학관 전면 유리에 새겨진 시인의 시구를 글자 그대로 읽는다. 시에 다른 생각이 필요할까. 시인의 시에 따르는 아름답고도 슬픈 배경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미 너무 알려진 자야(대원각 주인, 김영한, 길상화)로 불리는 이와 이루어지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의 사연에 모두들 주목하고 있지만, 당시 그런 시인과 집안끼리 억지로 혼인하게 하고, 첫날밤 남편의 사랑의 도피를 말도 못 하고 평생 가슴에 묻고 산, 어느 한 많은 여인의 삶은 또 어쩌란 말인가. 시인의 시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시로 바로 해석되고 읽히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요즘 백석 시인의 시가 계속 눈에 들어오는데 새해 첫날 찾아온 곳에서 이렇게 만나니 더 반가웠다. 인적 없는 거리의 풍경은 겨울 날씨와 잘 어울린다. 근대문화의 유물이 된 건물들을 인천시에서 고증을 통해 꾸며놓고 관광 상품화해서 지역의 발전까지 도모한다는 것은 근대 유적을 살리며 지역도 살리는 적절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건물들 사이사이 현대적 조형물들이 무심한 걸음을 붙잡아 세운다. 멈추어 찍고 다시 움직이고를 반복했다. 드라마 촬영 장소가 된 작은 카페도 몇 곳 눈에 띈다.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


돌아오는 길, 신포시장에 들러 긴 줄을 마다하지 않고 닭강정을 산다. 이미 방송을 탄 에그타르트도 하나 먹고, 밤과 고구마, 단호박이 들어간 고로깨도 주문한다. 시인의 시도 만나고 배도 채우고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일석이조의 행운이다. 인터넷 검색을 열심히 해서 데리고 가 준 정성에 보답하듯 그곳에서의 한나절을 만끽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왕이면 그곳에서 백석의 음식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흰 밥에 김치가재미도, 감자떡도 메밀국수도 먹고, 수박씨는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으나 호박씨는 간식으로 먹으면 어떨까.



* 백석의 시 제목을 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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