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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an 13. 2020

수라(修羅)*

‘지난밤, 거미는 시인했다.’

지난밤, 거미는 시인했다. 자신이 그 복잡한 그물을 만들었고 다신 안 그러겠다며 나간다고 했다고.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다, 상황을 믿지 않았다. 마음이 만들어낸 말이 소리로 들리는 것 같은,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믿었다면 달라졌을까. 마음을 다해 호소했다고 했다. 믿었다면 부탁대로 했을까. 이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은 벌어졌고, 들려오는 소리를 믿지 않아 다른 쓰레기와 함께 싸서 밖으로 버렸고, 이미 죽었을지도, 아니 죽었고, 죽었는데 지금 앞에 나타났고. 지난밤 갑자기 들려오는 말이 수상했지만, 무시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원망하고 왜 그랬는지 묻고 있다. 분명 공포인데 짜증이 치밀었다. 현실이 아닐 거라고 스스로에게 주문했고 얼른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의식을 일깨웠다. 그럴수록 꿈은 아니었다. 생생해서 오히려 비정상처럼 보이는 현실 아닌 현실 속에 내가, 그리고 죽었다고 생각했던, 죽었어도 상관없던 그것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지난밤, 욕실 바닥 청소를 오랜만에 했다. 하다 보니 배수구 근처에 까만 모래조각 같은 것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무심결에 물을 틀고 샤워기를 그리로 향했다. 바닥에 머리카락, 먼지 등을 닦는 솔로 긁어모았고 한꺼번에 휴지에 싸서 버릴 참이었다. 휴지로 쓸어 모으니 그것의 실체가 보였다. 너무 가늘어서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니 징그러웠다. 남편 이외에는 곤충을 기꺼이 건드리려 하는 사람이 없어서 평소 눈에 띄면 남편을 불러 세우곤 했다. 그대마다 남편은 종잇장을 가져와서 그 위에 얹어 창밖으로 던지고는 했다. 그렇게 이전에 간 것들의 엄마쯤 될까 싶은 것이었다. 밤이었다. 꺼림칙했지만 호들갑 떨지 않고 천천히 수습하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개의치 않았고, 잘 처리했다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방송에서 탤런트 이동욱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공유가 나왔다. 이야기 중 <부산행> 촬영 당시의 얘기가 나왔고, 동료들의 좀비 분장은 누군지 알고 봐도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다. 무서운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그 말에 공감했다. 길을 지나면 사람들이 전부 혼잣말을 하고 다닌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통화를 하는 모습들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보면 흡사 정신 놓고 혼자 떠드는 비정상의 풍경처럼 보일 때가 있다. 더군다나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어 통화 당사자는 밖으로 나오는 소리를 가늠하지 못하고 멀리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떠든다. 그 모습들은 불쾌하다가도 섬뜩할 때가 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큰 소리, 괴성들. 흡사 바이러스 같은 것이 침투해서 사람들의 뇌 속으로 파고들면 저런 광경이 연출되겠구나 싶었다.


방송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양치질을 하려고 화장실로 향했다. 지난밤에 정리한 것과 비슷한 것이 보였다. 안경을 고쳐 쓰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마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거미줄도 정리했고 세면대 아래도 싹 청소했는데 다시 나오다니……. 이것들이 어디서 알이라도 깐 것인가 생각했다. 거미의 생태를 모르니 섣불리 말할 수는 없었지만, 지난밤 버린 그것을 떠올렸다. 가족이려나, 무심히 생각했다. 긴 다리만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휙 쓸어 버려도 모를 만큼 작은 것이었다. 갑자기 그냥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보이면 그때 처리하자 싶었다. 문득 거미와 관련된 시가 떠올랐다. 그것을 생명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서술한 시인의 시심을 감탄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차였다. 그것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심지어 지난밤에도 자신이 말을 건넸다고 했다. 지난밤의 작은 목소리는 자신이었다고 하며 나의 행동을 원망했다.


그동안 스트레스가 심했나, 정신이 나갔나, 내가 딴 세상에 와 있구나 생각했다. 잘못한 것을 되짚어 보았다. 사람이 살면서 저지르는 잘못을 나도 그만큼 했다 싶었다. 내게 죄를 묻는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무서웠다. 존재 자체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의 말소리가, 마치 자신과 다름없는 것에게 건네는 말처럼 분명하게 들렸다. 내가 몰랐던 초능력이 발현됐다고 생각했다. 이런 능력은 원래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아니라 언짢았다. 같은 거미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을 더듬어 보았다. 다행히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리만큼이나 가늘게 들리던 소리는 점점 크고 또렷해졌다.


시인도 대화를 했던가. 시인*은 어떻게 했는지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먼저 새끼 거미가 왔었다. 그곳에 어마 거미가 왔고, 시인은 밖으로 던지며 먼저 온 새끼 거미를 만나기를 빌었다. 마음 아파하며 생각에 잠긴 시인에게 다시 더 작은 새끼가 방금 전 어미가 지난 근처로 왔다. 가슴이 메였다고 했다. 손을 내밀었다고 했다. 새끼는 울고불고한다고, 그렇게 시인에게서 달아나려고 한다고, 그것이 더 서럽다고 했다.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문밖으로 버리며 엄마나 누나나 형을 만나기를 빌며 슬퍼했다고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버렸고, 죽었다고 생각한 것은 다시 나타났고, 말소리는 또렷이 들리고, 환상도 현실도 아닌 가운데 내가 있고, 갑자기 시인의 마음과 견주어보니 그 작은 것들의 마음도 안됐고. 두렵고 겁이 났다. 상황은 아수라다. 차라리 길에서 마주하는 혼자 떠드는 사람들에게 퍼진 좀비 바이러스가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생각을 많이 했나, 기어이 내가 미쳤구나. 아직은 내게 위협을 주지 않지만 까마득한 것들이 화장실 바닥의 가장자리에서 슬금슬금 밀려오고 있었다. 뒷걸음질 쳤다. 발을 뻗으면 그것들이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올 것 같았다. 이쯤에서 얼른 도망쳐야 했다.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다! 가족들이 있다. 남편을 불렀다. 힘껏 소리쳤다. 소리쳤는데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그것과는 분명 대화를 했는데 비명은, 외침은 밖으로 터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힘을 다해 소리쳤다. “이 사람이 또 이러네.” 남편의 말이 들렸다. "으응~." 아무렇지 않은 듯 몽롱한 정신을 가장했다. 창피했지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좋은 꿈을 꾼 거야?” 걱정스런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석 <수라(修羅)>에 기대어 쓰다.


   수라(修羅)
                                  백석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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