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소설, <단 하나의 문장>
지난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행사 기간 중 부대행사를 진행하는 시청 앞 광장을 찾았었다. 행사 홍보관 사이로 다양한 업체의 홍보 부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공짜는 무엇이든 기분 좋게 하지만, 영화 티켓을 비롯해 커피, 음료, 주류와 백화점 포인트 상품권 등의 경품에는 더위로 풀린 눈도 잠시 번쩍 떠지게 했다. 사람들이 유독 길게 늘어선 부스는 역시나 모두가 탐을 낼 법한 경품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경품이 크던 작던 SNS 계정 등록이 필수였다.
더는 신상이 털릴 것도 없겠지만 매일 수십 통씩 쏟아지는 SNS 메시지는 공연히 휴대폰을 들여다보게 하고 알람이 올 때마다 신경이 쓰이게 만든다. 게다가 휴대폰의 속도를 현저히 느리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더는 SNS 계정을 늘리지 말자, 있어도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은 삭제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SNS 계정을 추가로 연결하는 것이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결국 남편과 나는 모든 경품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두고두고 신경이 쓰일 바에는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경품을 향한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행사장을 벗어나니 또 그리 섭섭할 것도 없었다.
요즘의 성격유형분류에 따르면 극 'I'가 가질법한 마땅한 결론이었다. SNS라는 것이 순간적이며 '행간이 지워지고 문맥이 잘린 채 전염 증식하여 구천을 떠도는 각종 사진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 그 순간에 영원히 결박되('지속되는 호의' p.91)'기에, 텍스트가 왜곡되어 영구히 박제되는 상황을 본능적으로 기피한 건지도 모르겠다.
구병모 소설 <단 하나의 문장>은 8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호의가 악의로 돌아오는 사연, xy 염색체의 폭력성, 바르게 사는 게 오히려 바보가 되는 세상, 불행 포르노 등 주로 여성을 중심인물로 내세운다. 더불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 실존적 불안, 다가올 시대의 윤리 등에 대해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시각 또한 예사롭지 않다. 현실적이며 깊다. 구체적이고 다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정까지 세밀하게 풀어내며 감탄하게 한다. '단 하나의 문장'은 단지 하나의 의미가 아니다.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에서는 남편 이완의 불가피한 전근과 임신으로 인한 퇴사의 압박이 있던 정주가 폐쇄적인 농촌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과 부조화를 보여준다. 마을공동체와 학교공동체의 구분이 따로 없는 곳에서 남편이 새로운 근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할 때, 퇴직한 임신 7개월의 정주는 농촌에서의 '해도 빛 안 나고 안 하면 대책 없는 자잘한 노동을 전담'하게 된다.
인기척도 없이 불쑥 다가오는 사람, 예고 없이 배를 슬쩍 건드리는 손길, '대대로 조상 잘 모셨으면 고추'라고 말하는 전근대적인 발화, 애를 안 낳는 사람들은 못 됐고 애를 가지면 장하다는 보편적 과거 체험과 자질구레한 일은 모두 아내 몫이라고 여기는 노인들의 사고방식은 내색할 수 없지만 놀랍고 당황스럽다.
거기에 품평하듯 바라보는 눈길들과 시골에 젊은 부부가 들어오게 된 사연을 파고드는 이웃들 사이에서 정주가 느끼는 불안과 불편함을 작품은 밀도 있게 담아내며 농촌 사회의 존재로 버텨내기 위한 정주의 소모적 노력들을 그려낸다.
제가 지금부터 산후조리원을 알아보러 시내로 나가야 해서요... 조리를 해? 벌써? 몸도 안 풀고? 그게 아니라 예약을 해두어야죠. 산후조리원이 뭐 하는 곳인지는 알지만 그걸 선금 걸고 예약까지 한다는 데에 노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개중에는 가뜩이나 계집들이 애를 안 낳아 나라가 망한다는데 실상은 조리원에 줄까지 서야 들어갈 수 있다니 당최 누구 말이 맞냐고 되묻는 이도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옛날에는 여자들이 일하다 밭고랑에 주저앉아 낫으로 탯줄을 끊었다느니, 집에서 돌보는 게 당연한 것을 무슨 애 놓는데 호텔씩이나 잡아 들어가느냐든지, 한 사나흘 자리보전하며 미역국 먹고 나면 으레 다시 밭일하러 애를 업고 나오는 법이라는 19세기 레퍼토리가 한 치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돌림 노래처럼 흘러나왔으며, 남편이 피땀 흘려 벌어다준 돈을 장사치들 아가리에 쏟아부어 되겠냐는 대목에서 정주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먼저 가방을 챙기거나 겉옷을 꿰는 등 부산을 떨면서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서 나가보아야겠는데요, 했다.(P.67)
SNS의 전파 속도만큼 말이 점점 더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 입으로 전해지는 말이라고 해서 그 강도가 약한 것은 절대 아니다. '...... 깡패 새끼라더라. 가까이 가지 말라더라. 넌 어떻게 된 게 밖에 하루종일 나가 있는 내가 그런 소리를 듣게 만드냐?'는 남편의 말에 정주의 입가에는 경악의 폭소와 실소가 나부낀다.
단지 커피가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된 발언은 정주에게는 상황 자체가 모욕이다. 게다가 친구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해 보지만, 그녀의 안녕하지 못함에 오히려 안도하는 듯한 목소리에는 지독한 무신경과 고소함이 담겨 있다.
정주가 아이를 출산하는 장면은 극적이고 참담하다. 말다툼으로 서먹해진 남편은 시내에 두고 온 정주의 휴대폰을 찾으러 나선다. 우천에 전원은 나가고 뉴스에서는 호우주의보가 흘러나오고 남편은 두 시간째 연락이 없다.
남편과 연락하기 위해, 전화기를 빌리기 위해 이웃집을 찾았지만 인적은 없고 때마침 양수가 터져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린다. 빗물과 양수가 출렁이고 진흙에 미끄러지고 눈은 감기고. 정작 폭우 속에서 자신을 구한 것은 문제의 깡패 새끼 최씨다. 그는 정주를 자신의 트럭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한다.
산후조리원에서 정주는 모든 면회를 차단하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일자리를 찾는다. 남편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남편과 자신을 향해 근거 없이 부풀려질지도 모를 소문을 차단하기 위해 애쓴 그간의 노력은 허상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반 이상 기부하고도 언제든 부속으로 교체될 수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알면서도 구직의 전화를 돌린다. '서로를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보다는 '누구도 그녀를 모르고 그녀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을 차라리 선택하려 한다.
시골이 인심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주로 방송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을을 지나는 사람을 불러 기꺼이 음료나 소주잔을 나누거나 하룻밤 쉬어갈 수 있도록 빈 방을 내어주는 넉넉한 인심 같은 것들이었다. 방송과 달리 최근 몇 년간 귀농한 지인들은 대체로 시골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쉽지 않다는 것이 지인들의 총평이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소문의 중심에 선 당사자가 된 느낌이 들었다. 푸르고 싱그러운 농촌의 자연과 어울리는 음악이 흐르는 풍경은 없었다. 감정은 이성을 무력화시켜 때론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지만 이성이 감정을 압도하는 순간 인간성은 사라지고 만다.
시골에 정착했을 때 자신마저 속이려는 정주의 감정적 노력이 걱정스러웠다. 출산 이후의 정주는 의식적으로 감정을 걷어낸 사람으로 보인다. 정주의 이성은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차갑게 식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어쩌면 소문에 휘둘리는 것보다 이성의 끈을 붙잡고 애쓰는 정주의 모습이 더 고되고 피폐해 보인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요즘처럼 '팩트'에 집중하는 때가 있었을까 싶다. 모든 사안이 터질 때마다 정교한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우리는 팩트에 열을 올린다. 어디에 오류가 있고 어디에 근거가 불충분하고, 또 어디에 나사가 빠지고... 오류와 근거와 나사를 채우느라 본질은 사라지고 소모적 논쟁만 남는다.
정주 부부에게 있어 본질은 보복성 발령이었다. 남편 본인도 모르게 진행된 부당한 전출이었고 장단을 맞추듯 임신을 핑계로 강요된 퇴직이었다. 애초에 팩트를 따지는 것은 무모했다. 제대로 된 반박도 못하고 떠나온 곳에선 소문의 중심에 놓인다. 추문으로 모욕감을 느꼈으며 위험한 출산에 직면했고 이제 다시 부당한 노동시장에 발을 담그려 하고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애초에 독립적인 삶은 불가능하다. 특히나 부조리한 사회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복잡하고 난해하며 피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힘들었던 것조차 빨리 지우고 현재에 집중하며 미래를 위해 다시 매달린다. 언젠가 지쳐 떨어질 개인의 인내와 노력 말고는 붙잡을 것이 없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다른 길은 없는 것인지 언제나, 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