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Nov 13. 2024

완벽함의 함정

며칠 전 지인이 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색색의 장미가 활짝 핀 풍경이었다. 11월에 장미라니, 지난 사진을 보냈나 싶었는데 메시지가 따라왔다. 근처 계양산에 가니 장미가 있더라고... 집에서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보내 준 정보가 틀림없다면 계절에 맞지 않게 꽃도 보고 가을바람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특별한 외출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계양은 평소에도 이런저런 일들로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가는 곳이다. 볼 일을 보고 나면 근처에서 밥도 먹고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하고 재래시장도 구석구석 들르고 가끔은 둘레길을 걷기도 한다. 마침 볼 일이 있어 그곳에 갔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동네의 맛집도 자랑할 만한 곳이 많지만, 계양에도 특별한 맛집이 있다. 음식에 정성과 맛이 느껴지는 그런 집. 언제나처럼 기분 좋은 푸짐한 식사를 했다.


식당을 나와 들른 곳이 지인이 보내준 사진 속 그 장소였다. 꽃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별 기대 없이 갔는데 알록달록 화사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드문드문 시들고 쪼그라진 장미도 있어서 완벽한 자태는 아니었지만 외래종의 크고 풍성한 장미가 보는 맛이 있었다. 얼굴도 몸도 마음도 버석거리는 계절에 따뜻함을 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세계 각국의 외래종 장미가 빽빽이 자리 잡은 장미원. 장미 이름이 쓰인 팻말을 하나하나 읽으며 천천히 둘러봤다. 노랗고 하얗고 주황에 빨강에 크고 작은 장미꽃이 멀리서 보기엔 언뜻 보기에 조화처럼 보였는데 손을 대니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생경하면서도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다.


*


오십 초반부터였나 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제일 정확한데도 뭔가 내 손에 쥘 수 있을 것처럼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길을 걷다 만나는 모든 꽃 앞에서 굳이 휴대폰을 켜고 카메라를 열고 쪼그리고 앉아 요리조리 가장 예쁜 구도를 잡고 사진으로 남겼다. 한동안 그렇게 꽃만 찍어대니 앨범을 열면 사람은 없고 꽃만 보였다. 한참을 스크롤을 내려도 꽃 사진만 가득한 앨범이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 세상의 모습이나 당장 품은 마음과는 많이 다른 낯선 세계, 온통 꽃으로만 채워진 앨범은 근심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세상이 존재하는 듯했다.


카메라에 담은 것은 바람이었던 것 같다. 단지 예뻐서 꽃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마음이 마르고 갈증이 나서, 자꾸 생생한 현재가 그리워서 애써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때의 나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고, 잔주름이 굵어졌고, 미래는 삭막하고 지루해 보였고,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시시콜콜 나를 설명하고 이해받기에는 세상은 너무 바삐 돌아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내게서 멀어졌으며 그런 현실을 나는 묵묵히 수용하고 있었다.  


세상을 알아도 모른 체하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 어설프고 흐릿한데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점점 밝아지는 것도 아이러니다. 그런 내가 미련스럽고 답답해서 떨치고 싶다가도, 그렇게 나란 존재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곤 한다. 석가는 태어나자마자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할 뿐이다’라고 했다는데. 내게는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


2만 원에 들여온 작은 몬스테라 화분이 2년이 지나며 4배 정도로 몸을 키웠다. 벌써 가지치기를 해서 작은 화분에도 멋들어지게 잎을 펼치고 있다. 거실로 들여놓았더니 잎 하나가 온통 햇살을 독차지하듯 창에 넓은 잎을 밀착하고 있어서 홀로 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로 화분의 방향을 슬쩍 돌려놓았더니 고개를 세운 잎이 살짝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그저 잎 하나인데도 좋으면 좋다고 열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생명 있는 것의 자기표현 본능인가 싶어 그대로도 좋았지만. 


마디마다 새 잎을 내던 개운죽이 몬스테라와 자리를 바꾸는 바람에 햇빛이 가려지며 제 빛을 잃는 듯 보였다. 먼저 나온 잎과 새 잎의 차이가 비교적 선명해서, 날마다 새 잎을 내는 것이 기특해서, 신기하고 신통하게 지켜보던 것이었는데, 요 며칠 잎의 색이 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옆의 몬스테라 영향인가 싶었다. 잠시 다른 것에 눈을 돌리면 어느새 외면받고 상처받는 것이 생기니 공평한 시선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갈증도 비슷한 것 같다. 외롭다가 쓸쓸하다가 허전하다가 지루하다가 무력하고 힘겹고 버거워지는 모든 단계를 거치며 넉넉히 회복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참 어렵다고 느낀다. 더구나 다양한 깊이와 넓이로 다가오는 삶의 굴곡이라는 것이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복잡하고 다단하게 변주되니 나만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것도 어렵다. 


*


그림책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콜린 오브라 비탈리 지음)을 읽고 내가 그간 겪은 혼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주인공 앙통은 말 그대로 '완벽한' 수박밭을 일구고 있다. 어느 날 수박 한 덩이가 사라지면서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완벽함이 파괴되고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과정을 거쳐 완벽함의 본질과 기준에 대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의 그림책이었다.  



책을 읽으며 내가 그간 경험한 마음의 혼란도 앙통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완벽함의 함정, '결점이 없이 완전하다'는 의미는 인간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영역이 아닐까 싶었다. 완벽함이란 또한 판단의 기준도 결여되어 있다. 결점이 장점이 되고 부족함이 넉넉함으로 바뀔 수 있는 세상에서 완벽함이란 그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에 의해 좌우되는 단어가 아니던가.


엉망이 되어버린 수박밭이 자연스럽고 오히려 완벽한 수박밭으로 변해 있었던 것처럼, 매 순간 혼란스러운 나의 감정은 오히려 완벽한 60대의 마음은 아닐까 하는. 끔찍하게 변한 수박밭의 수박들이 오히려 생기가 넘치게 보였던 것처럼, 지금 내 존재의 의미는 이대로 충분히 괜찮다 싶은 생각도 하게 됐다. 잃어버린 수박의 빈자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처럼, 결핍이나 갈증도 자연스럽게 묻힐 거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다음 날 아침, 앙통은 엉망이 된 수박밭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지만 이상하게 수박은 더 싱싱해 보였다. 정말 놀라운 건
도둑맞은 수박의 빈자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중)


때늦은 혼란이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라거나 오늘의 고민은 잠시 미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그리고 기꺼이 수용할 마음도 있다. 비록 엉망진창이겠지만 나의 살아있음을 오늘 또 깨닫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