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Jan 30. 2020

공항 나들이

남편 출장 때문에 공항에 같이 가게 됐다. 혼자 가도 되지만 며칠 동안 심하게 앓아 아무것도 준비를 못해 혹시 놓치는 것이 있을까 싶어 따라나섰다. 공항을 온 지 꼭 1년 만이다. 변한 건 없어 보이지만 넓은 공간에 홀로 있는 듯한 어지럼증은 여전했고 속이 울렁거렸다. 발권하고 로밍하고 환전하고 보험 들고, 미리 아무것도 준비를 안 해서 공항에 와서 모든 것을 다 했고 마지막으로 약까지 든든히 챙겨 주었다.


내게 첫 공항 나들이는 어머니 덕분이었다. 일본에 선교 여행 차 가신 어머니는 그곳에서 3년을 머무셨다. 어느 날 뜬금없이 일본을 가신다고 했고 먼저 일주일을 다녀오셨다. 현지에 아시는 목사님이 선교활동을 하던 교회가 그 목사님의 다른 일정으로 비게 되었다고 하셨고, 그 자리에 어머님이 대신 가시기로 하셨다고 했다. 목회자가 아닌데도 교단에서 그곳에서의 선교활동을 허락했다고 덧붙이셨다.


짧은 준비기간을 마치고 어머님은 일본으로 떠나셨다. 모든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셨고 처음 계획은 다른 목사님이 그곳에 선교사로 파견되기까지 1년 기간이라고 하셨다. 이민을 가시는 것처럼 단단히 준비해 가셨고 젊지 않은 나이에 지병도 있으셔서 가족들은 모두 큰 걱정을 했지만 시집살이를 하는 나만은 어머니의 긴 외유를 소리 없이 반겼다.


말씀으로 그곳에서 신앙을 전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도로 나눔으로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함께 하신다고 했다. 간단한 말씀 나눔은 했지만 본격적인 설교는 아니었고, 후임 선교사가 오시기까지 한시적인 활동이라고 하셨다. 이전에 모이던 사람들은 전임 선교사의 돌연 귀국으로 많이 흩어졌다고 했고 몇 되지 않은 신도들과 가족처럼 생활한다고 하셨다.


교단에서 허락한 선교활동이었지만, 장소 이외에는 별도의 선교 활동비 지원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차기로 오는 선교사의 부임까지 어머니는 그곳을 지키기 위해 처음 얼마간은 가져간 것으로 해결했지만, 기간이 길어지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하셔야 했다. 일본의 음식 문화가 그 해결책이 되어주었다.


매일 퇴근시간이면 그 나라 사람들은 먹거리를 사서 집으로 들고 간다고 했고, 주일마다 예배 보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대접하던 그 솜씨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팔면 어떠냐는 말이 나왔다고 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반찬가게가 시작되었다. 솜씨가 있어 많이 팔렸고, 손이 커서 팔다 남는 음식은 주변의 이웃들에게 퍼주는 식의 장사를 시작하셨다. 그럼에도 수입이 꽤 있었는지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셨다.


두어 달쯤 지나고 나서 어머니는 음식이 안 맞아 괴롭다는 말씀을 하셨다. 특히 김치는 한국에서의 김치와 달라 물이 많아 아삭 거리는 맛이 없다고 하시며 김치를 담가 보내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의 공항 출입은 김치 배달이 시작이었다. 일본을 오가는 선교사와 관계자들을 알음알음 섭외해서 가는 길에 10킬로그램 정도의 김치를 두 주에 한 번꼴로 보내게 되었다.


들어온 사람의 출국 날짜에 맞춰 전날 김치를 담갔고, 랩을 한 통을 다 써서 비닐에 담은 김치의 겉면을 칭칭 감아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냄새가 새지 않도록 포장해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전달했다. 접선하듯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기다리면 사람이 와서 인사하고 어머니 안부를 묻고 아는 체를 하고 김치를 가져갔다. 그렇게 정기적인 공항 나들이를 했다.


알타리 김치도 보내고 배추김치도 보내고, 처음 계획된 1년이 지나고 3년을, 그곳에 계시는 동안 나의 김치 배달은 주기적으로 계속되었다. 떠나시기 전에 어머니와 불편한 여러 사연들이 있었기에 김치 배달을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했다. 곁에서 부딪치는 것보다 멀리 떨어져서 안쓰러워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고, 장사하듯 김치를 담글지언정 차라리 감사했다.


당시는 김포공항 국제선 출국장이 만남의 장소였다. 지금 국제선은 인천공항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김포공항만 해도 과연 사람을 제시간에 만날 수 있을까 걱정할 만큼 넓었고, 오가는 길을 잃을까, 아이들 손을 놓칠까 걱정했었다. 수십 번의 공항 나들이를 끝으로 어머니는 돌아오셨고, 이후에도 어머니는 아르헨티나로 칠레로 여러 곳을 다니셨다. 신앙의 힘으로 어머니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셨고, 그 신앙의 힘이 내게는 시집살이에서 조여 오는 숨통을 트이게 하는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가끔 여행을 떠나서 외국의 공항에 내렸을 때, 시내로 나가는 길을 찾는 것을 한참 헤매는 일이 잦았다. 아니다, 늘 그랬던 것 같다. 복잡하기로 말하면 우리나라가 단연 일등이겠지만 그래도 말이 통하고 표지판을 읽을 수는 있으니 걱정을 던다. 그러나 외국에서의 공항은 말도 글도 낯설다. 출구를 찾는 것도, 그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나 버스를 타는 것도 수십 번 검색을 통해서 간신히 탈출했고 안도하곤 했다.


방학기간이라서인지 출국장의 풍경은 어지럽다. 수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밖으로 나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그들 틈에서 떠남의 의미를 덤덤하게 떠올린다.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의 안녕이 예전처럼 간절하게 마음이 조이지는 않다. 쉽게 떠나고 쉽게 돌아오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출국장의 긴 줄 때문에 마음이 바쁜 남편은 짧게나마도 이별의 인사나 절차 없이 눈짓만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항에 오니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꾹 누르고 다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온다. 다른 곳으로 가는 고속도로와 다름없는 길인데 이 길은 만남과 이별이 있어서인지 드나들 때의 마음의 무게가 가볍지만은 않다. 허전한 가슴을 두툼한 옷으로 여민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