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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an 20. 2020

어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시어머니의 새벽 기도

지금은 그리 부담스러운 말은 아니지만 십 대 이십 대 때만 해도 새벽기도라는 말은 내게는 꿈의 세계였다. 잠이 많아 일찍 일어나는 것이 항상 어려워 학창 시절에도 학교 문턱을 등교 시간에 간당간당하게 통과했고, 직장에 다닌 이후부터는 출근 버스의 시간에 겨우 맞게 버스를 타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혼 전부터 종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새벽기도라는 용어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함과 인내가 필수 요건이라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혹자들은 자신이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하느님이 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그 부지런함과 인내가 내게는 무척 부족했다. 간절함도 없었고 원치 않는 것을 해야 하는 의무감도 싫어했다.


이후에 바라는 바가 있어 작정하고 새벽기도를 한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시간은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떠졌고, 새벽 찬 바람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꾸준히 그 바람을 위해 기도했다. 혼자만의 바람은 사소하고 부끄러웠고 뭉뚱그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길 덧붙여 기도했다. 하루를 일찍 정갈하게 시작한다는 의미를 목소리 키워 말했고, 기도하는 기간을 마무리했었다. 그리고 이후로 어떤 상황에서도 나만을 위한 새벽기도의 필요성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았고, 그렇게 새벽기도는 내게서 멀어져 갔다.


살면서 자식을 위한 간절한 바람, 남편의 성공을 위한 바람이 왜 없었을까. 하지만 난 ‘내 것만을 위한’ 기도를 탐탁해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위해 간절히 비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그 바람이 특정한 한 사람에게만 이루어진다면 세상을 주관한다는 하느님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마음의 문제라고 일찍부터 생각했기 때문에 나만, 내 자식만, 내 남편만, 내 가정만이라는 한정된 기도를 한다는 것이 종교의 가치에 맞지 않은 것 같았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질 기도라면 안 해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앙심 부족한 사람의 개똥철학도 한몫했다.


결혼식 주례가 어머님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이었고, 어머님의 신앙생활은 결혼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넌지시 너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과, 그 기도가 무려 20일의 금식기도라는 말에는 아연했고 만류하고 싶었다. 그러지 마시라고 간곡하게 만류도 했다. 그럼에도 굳이 해야 하는 사연을 전설의 고향처럼 내놓으셨을 때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토속신앙과 기독교의 결합, 종교의 개별성을 목도했다. 그 이후로도 어머님은 때마다 여러가지 이름의 기도를 하셨고, 온 가족을 어머니의 건강 상태에 대한 걱정과 염려 속으로 밀어 넣으셨다. 목숨을 걸고 한다는 말씀을 아예 대놓고 하셨다.


결과적으로 어머니의 목숨을 내놓은 기도로, 나는 결혼을 했고 첫 아이인 딸은 이 땅에 태어났다. 그 이후에도 이 년이나 삼 년 걸러 한 번씩 어머니는 그 험난하다는 기도를 모든 사람들의 걱정과 염려를 담보로 누군가를 위하여, 라는 말을 내세우며 한동안 강행하셨고, 기도가 끝나면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것을 반복하게 했다. 그쯤 되면 감사가 아니라 금식 기도라는 말만 나와도 고개가 절로 저어지는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는 안 하신다.


결혼하고 여러 번 이사를 했다. 누구나 한 번쯤 있을 법한 사연으로 이사를 다녔고 이사할 때마다 사연은 하나씩 늘어갔다. 주변의 이웃과 친해질 사이도 없게 이사를 했고 서러운 사연을 남겼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강남에서 사셨고 우리는 의정부에 터를 잡았다. 어머니 다니시는 교회는 우리가 사는 집에서 버스 타고 5분에서 10분 거리였다. 당신 집에서 출발하면 교회까지는 1시간 30분가량 시간이 소요되었다. 새벽기도 마니아이신 어머니께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굳이 당신이 다니시는 교회로 새벽기도를 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말씀하셨다. 물론 그 이유도 있었지만 기억이 나진 않는다.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급박한 사연이었을 것이다. 기도를 안 하면 누군가 상해를 입을 수도 있다든가, 위기가 닥친다든가.


그렇게 장거리 새벽기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 어머니는 자정이 막 넘어가는 시간이 되면 우리 집의 문을 두드렸다. 막차를 타고 오신 것이다. 새벽에 여기서 나가면 된다고 하시며 방 하나 부엌 하나의 단칸방에, 40일을, 금요일을 빼고는 거의 매일을 방문하셨고, 중간중간 같은 교회 집사님들의 집에서 신세 지신 것을 제외하면, 한밤중에 오셔서 새벽에 가셨다. 한 방에서 다섯 식구가 같이 잠을 잤고, 새벽에 깜짝 놀라 눈을 뜨면 이미 떠나시고 난 후였다. 어느 날 몇 시에 온다는 말씀은 처음부터 없으셨다. 그때그때 전화도 없이 문을 두드리면 오시는 것이고, 연락도 없이 안 오시면 다음날 연락될 때 지인 집에서 자고 가셨다고 말씀하셨다.


40일, 그 시간 동안 어머니는 당신 며느리를 온갖 유형의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밤에 왔는데 식사를 챙기지 않는다고(매일 물었지만-그럴 리는 없지만 혹 빼먹었을지도, 그때마다 식사를 하셨다고 했다.) 했고, 깨어 있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잠들었거나 잠잔 척하며 늦게 문을 연다고 했다. 오는 것이 싫어 아무 대화 없이 바로 이불속으로 바로 들어간다고도 했고, 자리에 먼저 눕는다고도 했다. 당시는 3살 딸과 막 태어난, 백일도 지나지 않은 아들아이가 있었고 자다 깨는 아이들을 바로 다시 재우기 위한 행동이 있었는데, 당신의 아들과 딸들에게는 이상한 며느리로 만들어서 말을 했다. 그 말들은 어찌어찌 내게 들어왔고 그렇게 천하의 나쁜 며느리가 되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40일 이후로 어머니의 금식기도는 물론이고 새벽기도도 나는 싫어했다. 가족 예배에서 기도를 하시면 나를 향해서는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게 해 달라는 내용을 말씀하셨다. 그 기도를 들을 때면 나는 이중적인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뒤에서는 온갖 이간질로 세상 나쁜 사람을 만들고 앞에선 경건한 체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는 기도가 당신의 하느님에게는 닿았을지 그 오묘한 세계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가족끼리의 예배 시간을 힘들어했다.


당시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를 속으로 힐난했던 사람들을 지금도 가끔 만난다. 여전히 어머니의 며느리이기 때문이고 그들은 여전히 어머니의 지인이기 때문에. 속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그들은 당시의 어머니의 말을 내게 전하기도 한다. 그땐 그랬다고, 너희 어머니가 그렇게 독하다고. 그런 말들이 불편해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들과의 만남을 피한다. 그러고 나면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일들이 떠오른다. 어머니의 독단은 애초 나에게는 수용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억지로라도 균형을 이루게 하려고 나를, 내 주장을 포기했다. 그러한 이유로 말을 아꼈고 부당한 말을 들었고 그 결과가 지금까지 내 마음에 짙은 회한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모진 기억들도 지금은 강도가 반감되거나 망각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마음에 질문 하나를 품고 지내왔다. 어머니는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용기를 내서 묻고 싶기도 하다. 대답을 듣고야 말 것처럼 가끔 강하게 묻지만 그건 혼자만의 물음이다. 대답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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