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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Dec 23. 2019

구구단의 추억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

    가족이 모두 둘러 앉아 있다. 단란한 한때다. 엄마와 아버지가 웃으신다. 두 오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언니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막내에게로 향한다.


    가정에 TV라는 것이 막 보급되던 때였던 것 같다. 한 가정에 세상의 소식을 알리는 매체로 라디오 하나 겨우 있던 시절. 길에 뿌려지는 신문이 세상을 향한 눈이고 귀이고, 그것들이 없어도 살아지던 시간 속에 어린 내가 있다. TV가 없으니 가족의 시선은 가족에게로 향했던 것 같다. 모두 모인 저녁 시간, 나의 나이 4살 혹은 5살 때의 기억이다.


    6살 차이나는 오빠는 초등학교 3학년 쯤. 정확하지 않지만 한참 구구단 외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TV에서 아직도 개그의 소재, 게임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꼭 외워야 하는 공부로서의 구구단은 힘겨운 일임에 틀림없었던 것 같다. 오빠가 외우는 구구단의 앞자리. ‘이 이는 사, 이 삼은 육, ……’ 이 말 뒤에 4살 5살 아이의 구구단이 조용히 따라붙는다. 오빠의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던 것이 잠시 막히는 틈을 타서 새어 나왔던 것 같다.


    모두의 신기해하는 눈이 어린 꼬마를 향해 모여들었다. 외우기 난감해하던 오빠의 입이 딱 벌어졌다 닫혔고 대신 다른 가족들의 입이 열렸다. 이어지는 3단이다. ‘삼 일은 삼, 삼 이 육’ ……. 잠시 흐르던 침묵을 뒤로 하고 어린 입으로 주절주절 다음 내용이 흘러나왔다. 이어 4단 5단을 거쳐 8단 9단까지. 그렇다, 난 천재였다. 아니 천재인가 하고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 힘든 나의 어린 시절의 자랑 가득인,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이다. 들은 것을 기억을 잘 하는 꼬마였던 것 같다.


    애덤 그랜트는 <오리지널스>에서 “어릴 적 신동 소리를 듣던 천재들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일은 드물다”고 말한다. 이어 어릴 적 영재 혹은 천재라 불린 사람들의 현재를 추적한 조사를 소개하며 그들의 나중은 평범 이하의 삶을 살고 있더라고 덧붙인다. 애덤 그랜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반짝 뛰어난 암기력을 발휘하여 가족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았고, 구구단을 못 외워 힘겨워하던 오빠를 곤란한 상황에 빠뜨렸을 뿐이다.


    그의 말을 한 마디 더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을 평가할 때 실제보다 두 단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가족들의 1차 평가에 의해 나의 암기력에 대한 평가는 보통 이상을 넘어 천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먼 시간을 거스른 첫 기억 속의 사건을 다시 여러 단계를 높여 스스로 좋게 평가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최초의 기억 속의 나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천재에 근접했고, 가족의 주목과 웃음을 만들었다. 최초의 그 기억과의 만남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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