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행복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함께 밥을 먹은 지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요. 어쩌다 보니 시간이 흘러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거든요. 아빠는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지만, 엄마와 동생은 현재 고향(북한)에 서 살고 있어요. 동생이라도 엄마와 함께 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프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니까요. 그런면에서 엄마 옆에 동생이, 동생 옆에 엄마가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적에 엄마가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동생이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언니, 있잖아 나 사실 엄마 얼굴 기억 안나.” “괜찮아! 언니도 잘 기억 안나. 걱정하지마! 엄마가 우리를 알아볼거야.”
동생의 짧은 한마디는 제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한창 부모 님의 사랑받으며 살아야 할 나이에 저런 걱정을 하는 모습에 마음이 안 아플 수가 없었어요. 동생을 나름 위로한다고 했지만 사실 저의 위로가 동생에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몰라요. 너무 어렸을 적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빠, 엄마, 동생과 저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눴던 때가 어렴풋이 기억나요. 밥을 먹을 때마다 아빠가 항상 물을 떠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곤 했죠. 그때는 물 뜨러 가는 게 얼마나 귀찮고 싫었던지 아빠와 밥을 먹는 것이 싫어 일부러 같이 안 먹은 적도 있어요. 온 가족이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면 동생과 저는 서로 눈치를 봤어요. 아빠가 물을 떠 오라고 하면 그 자리서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동생을 달래서 물을 떠 오도록 했으니까요. 동생은 저를 따라서 언니 오빠들이랑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놀러 갈 때 데려가겠다고 달래면 동생은 뭐든 다 들어주었죠.
슬프게도 너무 어렸을 적에 가족과 함께 살았던 것이 전부라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할만한 가족과의 추억이 많지 않아요. 애써 기억해보면 아빠의 물심부름을 했던 것이 어쩌면 가장 평범하고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 에게는 당연한 일상이 제게는 유일한 가족과의 짧은 추억 이 된거죠.
어렸을 적 외할머니께서 항상 제게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어디 가서 부모 없이 자랐다는 말 듣지 말아야 한다며 저를 엄하게 키우셨어요.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누구보다 엄하게 혼내셨던 외할머니가 그리워요. 치매 걸리셔서 제게 상처를 주셨던 분이지만 누구보다 저를 아끼고 사랑해주셨던 분이라 더욱 그립고 보고 싶어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저에게 할머니의 사랑마저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은 이제 제게는 특별한 희망 사항이 되었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상에는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이에요.
혹시 지금 밥상에 반찬이 맛이 없다고 부모님께 투정하거나, 혹은 부모님으로부터 핀잔을 받아 불만인가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일상도 누군가에는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부모님의 잔소리도 현재 곁에 있다는 증거이니 부디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서로가 상처보다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살았으면 해요. 누 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그리 길지 않잖아요.
저는 현재 아무도 없이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힘들고 지칠 때마다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예요.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렸을 적 가족과의 추억과 엄하게 저를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짧지만, 행복했던 추억이 있기 때 문이죠. 아빠의 마지막 부탁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괜 찮아요. 그리워하고 잊지 말아야 할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안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