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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Sep 11. 2023

소녀가장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제 나이 참 어렸어요. 그때는 이미 세상을 다 알기라도 하듯 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또래보다 조금 더 일찍 철든 어린아이일 뿐이었어요. 갑작스럽게 맞이한 엄마의 행방불명과 아빠의 사망으로 동생과 저는 한순간에 고아가 되었어요. 저도 어렸지만, 동생은 저보다 3살이나 더 어렸기에 제가 동생을 돌봐야만 했거든요. 고맙게도 동생은 저를 참 많이 따라줬어요. 엄마, 아빠보다도 저를 더 많이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왜 그렇게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게 귀찮고 싫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어린 나이에 동생을 돌봐야 하는 소녀 가장이 되면서 저는 어렵게 다니던 초등학교도 더이상 다닐 수가 없었어요. 집안일이며 동생을 밥 챙겨주는 것까지 모두 제 몫이었으니까요. 무단 결석 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반 친구들은 저를 데리러 오는 날이 많아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반 친구들이 저를 데리러 집에 왔던 적이 있었는데 저는 집에 없는 척 숨죽이고 있었어요. 친구들은 대문 밖에서 제 이름을 부르며 대문을 쾅쾅 두드렸어요. 창문을 통해 빼꼼히 내다보니 같은 반 친구인 경희라는 친구였어요. 그 친구는 다리가 좀 불편한 친구였어요. 같은 동네 친구이기도 했죠. 친구는 마치 제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대문 안쪽을 향해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 없으면 학교 더 잘 나와야지, 엄마 없다고 학교도 안 나오냐? 어쨌든 오늘은 그냥 돌아가지만, 다음에 데리러 올 때는 무조건 데려갈 거야.”     


친구의 짧은 말 한마디에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이 멍한 느낌이 들었어요. 동생은 멍하니 앉아있는 저를 보고 괜찮냐고 물었어요. 사실 동생 때문에 학교에 안 간 것도 있었지만, 학교에 가서 부모 없다는 놀림 받는 것이 싫어 안 갔기 때문이죠. 엄마가 행방불명되고 난 후로는 학교에 가면 친구들은 너희 엄마 중국으로 간 것 아니냐며 서로 수군거리고 대놓고 저에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사실 저조차도 엄마가 어떻게 됐는지, 어디로 갔는지, 심지어 생사조차 모르는데 말이죠. 사실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나기도 했었어요. 어쨌든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게 싫어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중퇴하게 되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의 나이에 갑자기 고아가 되고,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고 저는 학교보다는 시장으로 향했고 부모님에게 투정 부리기보다는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소녀 가장이 되었죠.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어요. 성인이 아니어서 공식적으로 어디 가서 일할 수는 없었지만, 동네에서 아이들이 부모님 도우며 하는 일들을 찾아서 열심히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어요. 결국, 저는 동생을 이모 집에 보내기로 했어요. 당시 제가 동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감사하게도 이모가 동생을 이모 호적에 올려 딸로 키워주겠다고 했거든요. 엄마가 행방불명되기 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인간 된 도리로 동생을 책임져주겠다고 했죠. 저는 동생을 굶기지 않고 학교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기쁘고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동생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어요. 하지만 동생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동생과의 이별을 마지막으로 소녀 가장의 짐은 조금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돌봐드려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그 후로도 몇 년간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도와 집안일이며 밭일을 도맡아 하며 말 그대로 저의 유년 시절은 소녀 가장 그 자체였어요.

      

힘든 일도 많고 억울하고 슬픈 날도 많았지만, 마냥 힘들다고 불평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저는 꿋꿋이 하루하루 버텼어요. 그렇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었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힘든 상황이었기에 누구에게 기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죠. 그렇게 저는 일찍이 가족과의 이별을 통해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때의 힘든 순간들이 지금 저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자산으로 남았어요.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지만,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소녀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게 해준 동생과 이별 한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어요. 다 늙어서 서로 못 알아볼지라도 죽기 전에는 꼭 한번 만나고 싶어요. 언제라도 좋으니 그날이 오길 간절히 희망해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기차표를 끊고 어디든 갈 수 있듯이 언젠가 제 고향도 기차표 하나 끊어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두 손 모아 기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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