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과 진실
대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가 있었다. 클럽 죽순이라 학교도 잘 안나와서 볼 기회도 별로 없었는데 그 언니는 농담 잘 하는 내가 재밌다며 한번씩 찾았고 가까운 데 사는 걸 안 뒤로 종종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대학원도 가고 자격증도 따고 안정된 직업을 가졌는데 결혼을 못해서 소개팅을 일년에 백 번도 넘게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식구들까지 대동해서 소개도 해주었건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녀는 미혼이고 나는 비혼이다보니 결혼한 친구들보다는 연락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이상하게 대화는 늘 겉도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만나서 즐겁거나 배우게 되거나 정서적 교감이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편안하기라도 해야하는데 이 언니와 있을 때는 그저 껍데기만 보는 느낌이었다. 나처럼 책이나 미술관을 좋아한다지만 작품에 대한 대화보다 인증하기에만 바빴고 타인의 옷이나 소지품에 관심이 많았고 같이 공을 쳐도 필드가서 사진만 찍어댔고 내가 차를 바꿨을 때도 부럽다며 본인도 이내 외제차로 바꿨고 남자에게도 조건을 너무 따져서 못사귀거나 오래 사귀는 법이 없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속물, 물질만능 이런 단어만 떠올랐다. 사유깊은 진지한 대화는 기껏해야 결혼 못한 신세타령이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 거리를 두었다.
본인은 뭔가 고상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런 그릇은 안되는 것 같고 따라는 하지만 스스로도 만족을 못하니 불행한 것이다. 그 외모와 학벌에 지혜까지 겸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에 안쓰럽기도 하지만 사람은 마음을 크게 먹지 않는다면 쉽사리 바뀌지 않기에 나 역시 같은 길을 동행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결국 내 옆에 남는 사람은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일 것이다.
지금 나와 가장 잦은 교류를 하고 있는 친구는 그 언니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인데 그녀는 늘 내면의 일렁임을 관찰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발전하려 노력하며 3개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있는 주부이다. 대기업 다니는 남편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퇴사시키려 경제공부도 시작하고 큰집으로 이사갈 비용으로 남편, 딸과 함께 스페인에서 일년살기를 꿈꾼다는 그녀는 늘 웃음과 기쁨으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좋은 책이 나오면 서로 보내주기도 하고 통화를 했다하면 세시간은 기본일 정도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고받는데 우리가 가장 많이 다루는 주제는 행복이다. 이 친구도 동네 아줌마와 어울려보다가 다 그렇고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에 지쳐 혼자 노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했다.
세상이 규정한 정답은 없지만 누구나 자신의 삶에 정해놓거나 끌리는 규격이란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읽지도 않고 내 글에 좋아요를 눌러대거나 습관된 과잉 리액션으로 내 말에 맞장구 쳐주는 사람, 그리고 그저 인맥 하나 더 늘리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어쩌면 진정성과 진실에 과하게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포장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더 특별한 상황은 언제나 비정상으로 보이고 반갑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