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가치
자신은 쓸모가 없다며 풀이 죽어있는 사람이 있다.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쓰여져야 쓸모있어지는 것인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대학생 때, 인간은 왜 태어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를 계속 생각하다가 사르트르 책을 읽게 되었다. 사람은 그냥 태어나고 존재할 뿐 목적과 본질이 없으며 그것은 내 자유 의지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엄마가 은근히 바라시던 판사나, 고3 담임이 귀따갑게 권유하시던 정치인이 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나로 태어났고 상황에 따라 다른 색깔을 보이는 사람으로 살았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왜 사는지, 어디에 쓰이는 인간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굵고 곧은 나무는 쓸모가 있어서 도끼에 빨리 찍혀 죽게 되고, 얄궂게 생긴 나무는 쓸모가 없었기에 살아남았다는 장자의 얘기처럼, 쓸모없음이 쓸모있을 때가 있고 더 좋을 때도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주관적인 입장에서 쓸모와 목적을 따지며 산다. 쓸모있음이란 무엇인가. 돈이 된다 안된다, 건강에 좋다 안좋다, 편리하다 불편하다, 이롭다 해롭다 등 득실을 따지며 계산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조그만 이득이라도 보이지 않는 순간 그것의 실존 자체까지 부정하고 의심하게 된다. 갓난 아기는 맡은 역할이 없지만 존재 그 자체로 고귀하고, 문학과 예술, 음악은 특별한 쓰임새보다는 그 자체로 훌륭하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셈이다.
우리는 실존하고 있으며 본질은 우리가 결정하고 만들어 갈 수 있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가 생긴다. 물론 의미나 본질이나 목적이나 쓸모가 없이 살아도 괜찮다. 사람은 존재만으로 충분히 가치있고 언제든지 탁월해질 수가 있다. 그냥 그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깊이 들여다 보면 은근한 행복이 피어오를 것이다. 실존이고 본질이고 간에 지금 행복하면 그것으로 된거다. 쓸모가 없어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너저분한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