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없는 마음
세상만물은 상대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는 것은 없음이 있어야 있을 수 있고, 없는 것은 있음이 있기에 없을 수 있다. 없음 자체가 없으면 있는 것도 없고 있음이 없으면 없음도 없다. 이것이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다. 나는 대상이 있어야 존재하고 대상은 내가 있어야 인식된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고 너라는 존재가 없으면 나라는 개념도 없다. 이것이 자타불이(自他不二)이다.
부처는 중생이 없으면 부처라는 상이 생길 수 없다. 중생은 부처라는 상대적인 존재가 있기에 중생이라 명명된다. 삶은 죽음이 있어서 삶이라 할 수 있고, 죽음은 태어났기에 생기는 것이니 삶은 곧 죽음과도 같다. 젊음과 늙음, 밤과 낮, 어둠과 밝음, 긴 것과 짧은 것, 크고 작은 것, 번뇌와 해탈도 마찬가지이다. 태극 문양처럼 그것들은 늘 한 몸으로 함께 움직인다. 둘로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불이(不二)이라고 한다.
일주문과 대웅전 사이에 불이문(不二門)이 있는 절들이 있다. 만물은 일체이니 그 문을 지나면서 차별을 버리고 입장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불이사상은 깨달음과 직결된다. 불이를 모르고는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을 자신과 동일시 여기는만큼 애정을 쏟고 부처님께서도 자신이 중생과 하나라고 생각하셨기에 중생구제에 힘을 쓰셨다. 성경에서 내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도 남과 나를 하나로 봤기 때문이다.
사실 깨달음이란 것도 없다. 깨달았다는 그 생각이 머무는 순간 그건 깨달음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알았다 몰랐다를 반복하며 자유로워지기 위해 답을 찾아나간다. 진리를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예수께서도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정작 진리는 직접적으로 내가 처한 환경과 상황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자유를 주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덜 매이고 덜 고통스럽게 만들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리가 자유를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니 진리가 곧 자유이고 그 둘도 하나이다.
유마경을 통해 불이를 처음 접한지 이십년이 다 돼가는데도 나는 아직까지 분별심과 시비심의 굴레를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다. 자칭 레알 자유인이라면서도 정작 내 틀을 깨지 못하고 색성향미촉법에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를 갖다 붙인다. 일년에 3분기 이상 집을 비우고 온전하게 자유로운 인생을 살면서도 한번씩 갈증이 느껴지는 이유는 내 마음 속에 세워둔 자잘한 칸막이들때문일 것이리라.
불이를 100% 체득한 사람은 부처의 경지가 된다. 우주와 일체되면 윤회를 끊을 수 있다. 내가 곧 부처이니 못할 이유도 없다. 갑진년도 벌써 중반을 향해 달려간다. 좋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부지런히 육바라밀에 몰입하여 모든 장벽을 허물어야지. 그리하여 세계가 아닌 우주를 넘나들어야지. 내가 머무르는 모든 곳은 나의 수행처가 된다. 나는 이제 피안의 세계로 떠난다.
감사합니다:)